서얼, 똥구덩이 속의 사람들
이 글을 읽는 분은 여성이신가, 남성이신가. 혹 여성이라면,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은 적은 없으신가? 성차별이 근본적으로 부당한 것은, 차별의 근거를 차별받는 개인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나기를 스스로 결정하여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 이제 말하려 하는 조선시대 서얼의 경우 역시 자신의 선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반쪽 인간’으로 차별받았던 사람들이다.
성호는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문제(庶?防限)」(8권, 인사문)란 글에서 이무(李?, 1600~1684)의 상소를 길게 인용한다. 상소의 내용은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무는 왕이 다스리는 모든 인간은 왕의 신하이며,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은 정실의 적자와 첩실의 서자가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전제하고, 그 구체적인 증거로 서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관리와 훌륭한 장수, 학자와 현인을 열거한다. 이 증거로 그는 다시 ‘서얼은 외가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선은 적고 악이 많다’라는 속설을 반박한다. 이어 이무는 서얼을 사람 취급 하지 않으며, 자신을 성취할 길을 열어주지 않고 차별하기에 서얼 중에는 과연 인격이 삐뚠 사람이 많은데,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똥구덩이에 밀어 넣고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격’이라는 것이다.
서얼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양반 남성이 양민의 여성을 첩으로 취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서자가 된다. 만약 천민 여성을 취해 자식을 낳으면 얼자가 된다. 합쳐서 서얼이다.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다. 따라서 아버지가 영의정이라 할지라도 관청의 계집종과 관계하여 얻은 아들은 자동적으로 관청의 노비가 된다. 양민 여성의 경우는 양민이 되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지만, 그가 나갈 수 있는 관직에는 한계가 있었다. 『경국대전』 「이전」 ‘한품서용(限品敍用)’조(條)를 보자.
2품 이상의 문관, 무관의 양인 출신의 첩〔良妾〕에게서 난 자손은 정3품까지로 제한하고, 천인 출신의 첩〔賤妾〕에게서 난 자손은 정5품까지로 제한한다.
6품 이상인 자의 경우는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난 자손은 정4품까지로 제한하고, 천인 출신의 첩에게서 난 자손은 정6품까지로 제한한다.
7품 이하부터 관직이 없는 자의 경우는,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난 자손은 정5품까지로 제한하고, 천인 출신의 첩에게서 난 자손과 천인으로서 양인이 된 사람은 정7품까지로 제한하며,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난 자식이 다시 천인 출신의 첩에게서 본 자손은 정8품까지로 제한한다.
뒤로 갈수록 말이 복잡해지지만 이치는 간단하다. 어머니가 양인 출신이냐 천인 출신이냐에 따라, 그리고 아버지의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식의 벼슬길에 제한을 두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영의정이고 어머니가 관청의 계집종이었다 치자. 아들은 아무리 세상을 놀라게 할 능력이 있어도 정5품 벼슬을 하면 끝이다. 공평해 보이는가? 억울하지 않겠는가?
성호는 이무의 상소에 대해 “이 상소는 명백하고 절실하여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한다. 만약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이 상소의 말을 그르게 여기겠는가? 그런데도 아직까지 시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성호의 개탄처럼 이무의 말은 흰 종이 위에 얹힌, 힘없는 문자의 나열로 끝나고 말았다.
성호는 서얼들이 이 제한을 풀기 위해 움직였던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선조 초기에 신유(申濡) 등 1천6백여 명의 서얼은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한다. 선조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은 곁가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말로 답하며 서얼에게 길을 조금 터주었다. 봉상시와 교서관에 너덧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1625년 인조는 대신과 2품 이상을 불러 서얼 허통(許通)에 대해 논의하라고 명한다. 논란 끝에 비변사에서 서얼 허통을 결정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인조 실록』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11년 10월 15일’조의 『인조 실록』에 이 법이 사문화되었음을 지적하는 이조의 계사가 실려 있다. 이 계사에 의하면, 원래 1625년 서얼 허통을 발의한 사람은 이원익(李元翼)이며, 그때 논란 끝에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난 사람은 손자대에 가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고, 천인 출신이 첩에게서 난 사람은 증손자대에 가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요직(要職)은 허락하고 청직(淸職)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 기사에 의하면 요직은 호조?형조?공조의 3낭관과 각사(各司) 등의 관직이다. 밝히지는 않았지만, 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의 삼사(三司), 세자시강원 등의 벼슬을 청직으로 친다. 청직은 왕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벼슬이다. 또 청직을 거쳐야 고위 관료로 출세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법은 9년 동안 한 번도 시행되지 않는 사문화된 법이었고, 여전히 봉상시나 교서관의 서너 자리만 과거에 합격한 서얼의 몫이었다. 이조에서는 이것을 지적하여 서얼에게 약속했던 자리를 주자고 했고 왕은 또 동의했지만, 실천되지 않은 것은 꼭 같았다.
다만 선조와 인조 때의 개혁 시도는 서얼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때 드는 좋은 근거가 되었다. 예컨대 이무는 “어떤 사람은 조종(祖宗)의 옛 제도란 구실을 댑니다. 하지만 이백 년 동안 막았던 것을 선조조에 와서 허통했고, 인조조에 와서 호조?형조?공조에 허통했으니, 이 또한 잘못된 일입니까?”라며, 선조와 인조 때의 효과 없는 허통일망정 서얼 허통의 중요한 근거로 인용했던 것이다.
성호는 “숙종 21년(1695) 영남 사람 남극정(南極井) 등 9백88인이 상소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승정원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숙종 실록』 등에는 나오지 않는다(다른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듬해인 22년(1696)에 이조판서 최석정(崔錫鼎)이 인조 때 고친 법이 여전히 사문화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그 법을 실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이후 식자들은 서얼 차별이 합리성이 전혀 없는, 각박하기 짝이 없는 제도라고 끊임없이 지적했고, 정조의 경우 서얼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신하들에게 명했으나 차별은 끝끝내 철폐되지 않았다. 서얼을 차별하는 습관은 20세기 후반까지 잔존했으니, 악법은 한 번 만들어지고 그 악법을 통해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는 이상 쉽게 철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서얼 차별 문제를 보면 사대부 체제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알 수 있다. 서얼 문제는 기본적으로 양반-남성의 성욕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양반들은 정처(正妻)에 대해서는 그 여성이 오직 자신에게만 성적으로 종속되는 존재일 것을 요구했다. 그 요구는 자신의 사후에도 성적 종속성이 실천되기를 바랄 정도로 강렬했으니, 이른바 수절이란 그래서 만들어진 윤리다. 자신의 생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그 성적 종속성이 위협받을 경우, 남성은 여성에게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희생하여 성적 종속성을 천명할 것을 요구했으니 그것을 실천한 여성이 다름 아닌 열녀다.
남성의 성욕은 일단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할 장치로서 정처를 확보하고, 잉여의 성욕을 ‘첩(妾)’을 제도적으로 존치시킴으로써 풀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소유물인 노비 중 여성을 기생으로 존치시켜 성욕을 충족했다(기생을 차지하여 첩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소유한 계집종을 건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식은 사회에서 버림받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만다! 이게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아비가 잉여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벌인 성행위가 천대받는 인간을 쏟아내다니, 그 자식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서얼 문제는 지금 이 시대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조선 양반사회의 적장자를 우대하는 가부장제는 정통성에 대한 집착을 낳았던바, 그 집착은 지금도 형태를 달리해가면서 면면히 이어진다. 예컨대 학벌의 정통성이 그것이다. 이것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적자와 서얼을 차별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대학입시란 것이 적자와 서얼을 가려내는 국가적 작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