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을 만드는 세상
성호는 「도둑을 잡고 벼슬을 받다(捕盜受職)」(8권, 인사문)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즘 인구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 백성들은 경작할 땅이 부족하건만, 널찍한 들판이 텅 빈 채 버려져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도둑들이 백성의 재산을 빼앗기에 백성이 그 땅에 흩어져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구가 불어나 농토가 부족하다. 널찍한 들판이 있으면 일구어 곡식을 심고 가꾸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텅텅 비어 있다. 왜인가. 도둑들이 횡행하여 백성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조?정조 시대에 횡행하는 도둑 때문에 농토를 비워야 할 정도였다니 뜻밖의 일이 아닌가. ‘영정조 르네상스’ 운운하면서 그 시대를 마치 천재의 시대, 태평한 세상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말 같지 않은 것이니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겠다.
성호는 「임꺽정(林居正)」(14권, 인사문)에서 홍길동과 임꺽정, 장길산을 조선시대의 가장 큰 도둑으로 꼽는다. 그는 장길산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글을 맺는다. “나라 안에 몸을 감추고 도둑질을 한 것은 새장 속의 새나 물동이 속의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온 나라가 근심하고 부지런을 떨었지만 끝내 잡지 못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꾀가 없는 것이 자고로 이와 같다. 이러니 어떻게 외국의 침략을 막고 이웃나라에 위엄을 보이겠는가? 슬픈 일이다.” 도둑 하나를 잡지 못하는 조정이었으니, 어찌 외국의 침략을 막을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분은 어떤가? 최근 일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없으신가? 각설하자. 어쨌거나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좀도둑도 아니고, 떼도둑이 웬 말인가?
절도를 금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구약성경』의 십계명의 여덟번째 계명이 ‘도둑질하지 말라’이고, 고조선의 팔조금법도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고 못 박고 있다. 남의 소유물 또는 생산물을 훔치는 것을 허용하면 사회의 생산 시스템 자체가 붕괴한다. 이런 까닭에 절도는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금기이며, 당연히 강력한 처벌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도가 없었던 때는 없었다. 도리어 도둑을 영웅처럼 여기기도 한다. 예컨대 홍길동과 장길산, 임꺽정 등은 문인의 붓끝에서 의적으로 그려지지만, 과연 그들의 실체가 그러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무명의 수많은 도둑들이 탐관오리만을 털었을 것인가. 역시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자들이 아직까지 의적으로 남은 것은, 그들의 행악보다 지배체제가 더 증오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다. 농사를 지어 먹고살 수 있다면 굳이 도둑으로 나설 이유가 없다. 성호의 말을 들어보자. 「굶주림과 추위가 도둑을 만드는 법이다(飢寒作盜)」(12권, 인사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백성이 굶주림과 추위에 몰린 나머지 도둑이 되어 살길을 찾으니, 그것은 이와 같은 신세라고 할 것이다. 이가 옷의 솔기에 숨어 산다. 그런데 사람을 깨물지 않으면 살아갈 방도가 없고, 또 이미 제 몸이 있으니 죽음을 면할 도리를 찾고자 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의 처지에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사람을 깨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깨물어서 사람의 피부를 손상시키면 사람이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사람 또한 부득이 이를 태워 죽이게 된다. 이는 사람을 깨물지 않으면 굶어죽고, 깨물면 또 불에 타 죽고 만다. 어리석은 백성이 도둑이 되어 살길을 찾으니, 비록 부득이 잡아 죽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실정을 보면 또한 동정할 만하다. 증자(曾子)는 “만약 그 실정을 알게 된다면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기뻐하지 말라(如得其情哀矜而勿喜)” 하였다.
이는 사람을 물어 피를 빨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고, 물어 피를 빨면 사람 손에 죽는다. 도둑질도 그와 같다. 죽을 수밖에 없게 된 백성이 하는 수 없이 택하는 길이다. 도둑질은 나쁜 짓이지만, 그 사정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양심이 있는 지배계급의 생각이었다. 도둑질은 결국 자신들의 통치 행위가 불량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증자의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내친 김에 증자의 말을 좀더 더듬어보자.
증자의 말은 『논어』 「자장(子張)」에 나온다. 당시 노(魯)나라의 권력자 맹씨(孟氏)가 증자의 제자인 양부(陽膚)를 사사(士師)로 삼았다. 양부는 증자를 찾아가, 사사가 맡은 일인 옥사(獄事)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증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백성이 흩어진 지 오래다. 그런 사정을 안다면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할 것이 아니로구나.” 지배층이 도둑을 발생시킨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니, 그 범죄는 불가피함이 있다. 그러니 불쌍히 여겨야지 잡았다고 기뻐하지 말란 말이다.
성호는 이 문제를 「도둑을 걱정한다(患盜)」(18권, 경사문)란 글에서 재론한다. 이 글은 『논어』 「안연(顔淵)」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계강자(季康子)가 도둑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여 공자에게 대책을 물었다. 공자는 “만약 그대가 바라지 않는다면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원문을 보자. “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 不竊.”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자의 대답 중 ‘苟子之不欲’이란 부분이다. 주자는 이 부분에서 ‘불욕’을 ‘不貪欲’으로 해석했다. ‘그대가 탐욕스럽지 않다면’ 혹은 ‘욕심이 없다면’이란 뜻이다. 하지만 성호는 ‘욕’을 원한다, 바란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대가 백성들이 도둑질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비록 백성들에게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는 이 말을 더 알아듣기 쉽게 푼다. “만약 당신이 백성이 도둑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어찌 그 방법이 없겠는가? 도둑이 생기는 원인을 없애버리면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다.” 주자보다 성호 쪽의 해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공자는 도둑의 발생을 계강자 개인과 관련해 논했지만, 성호는 이 문제를 위정자 일반으로 확대한다.
대저 도둑질은 먹고 입을 것이 부족하기에 하게 되는 법이니, 굶주림과 추위에 내몰리면 올바른 도리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아무리 깨끗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백성에게 생업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입고 먹을 것이 모자란 나머지 온갖 고생을 갖추갖추 겪는다면, 어찌 도둑질을 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몸이 얼고 굶주리면 윤리와 도덕, 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 곧 생명체로서 자기 존재를 존속시키려는, 저 인간 내부의 심연에 자리 잡은 존재욕은 윤리와 도덕, 법을 순식간에 뛰어넘고 만다. 그리하여 굶주림은 범죄를 정당화한다. 정치하는 사람이 욕심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해서, 인격적이고 도덕적 존재라고 해서 그의 임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하는 자라면 백성에게 생업, 요즘으로 치면 안정된 직업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것에 실패해서 의식주가 부족하여 곤궁에 시달린다면 절도로 나서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국가의 폭력이 제재하기 때문이다. 성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 후기의 백성들이 “그래도 감히 제멋대로 도둑질에 뛰어들지 못하는 것은, 오직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엄’이 바로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이다. 절도로 백성을 내몬 뒤 다시 절도하는 백성을 국가의 폭력으로 다스리기에 백성이 쉽게 절도에 나서지 못할 뿐이다. 위정자의 실정은 백성들을 도둑으로 만들고, 다시 그 백성은 국가권력으로 처단하고! 역사는 이 이해 불가능한 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갑갑하기 짝이 없다.
도둑을 어떻게 해야 사라질 것인가. 성호는 그 방법은 “백성을 번성하게 한 뒤에는 부유하게 만들어주고, 부유해진 뒤에는 가르친다”(『논어』 「자로(子路)」)라는 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도둑의 길로 나설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일수록 실천은 불가능하다. 성호의 생각은 결코 실천되지 않았다.
성호는 위에서 인용한 글 외에도 도둑에 관한 글을 여럿 남기고 있다. 도둑 잡는 방법을 논한 「치도(治盜)」(인사문 7권, 10권)도 두 편이나 남아 있다. 그는 후주(後周, 951~959)의 두엄(竇儼)의 도둑 잡는 방법, 예컨대 도둑 내부에 고발자가 있으면, 고발한 자에게 고발당한 자의 재산의 절반을 상으로 주는 등의 여러 방법을 인용하고 실천해볼 것을 바라고 있다.(「치도」 7권) 이 또한 시행되지는 않았다.
나는 증자와 공자, 그리고 성호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도둑이 된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말에는 이미 처벌을 전제되어 있다. 동정이 수반되기는 하지만, 처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이 되게 하는 그 체제와 그 권력자들은 왜 치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단 말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부패한 정치권력과 지배계급은 왜 치죄되지 않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