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자가 왜 출세하는가?
『성호사설』 곳곳에서 성호는 백성의 궁핍한 삶에 대해 언급하면서, 관리들이 탐학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읽기 고통스럽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원래 인간 사회의 현실은 직시하면 고통스럽기 마련인 것이다. 한데, 사대부가 벼슬을 하기 위해 익혔던 사서삼경은 사대부가 도덕적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학은 왜 그치지 않았던 것인가. 성호의 말을 들어보자.
성호는 「사적관(私?官)」(8권, 인사문)이란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옮기고 있다. 당나라의 문호 한유(韓愈)가 지은 위단(韋丹)이란 인물의 묘지(墓誌)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내용은 대개 이렇다. 위단이란 사람은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사람에게 주현관(州縣官), 곧 지방 수령 자리 열 곳을 주며 그 자리를 팔아서 사신단의 비용에 쓰라고 했던 모양이다. 매관매직을 해서 번 돈으로 사신 행차에 들어가는 비용을 댄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관행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다. 오직 위단만이 문제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고, 황제는 나라에서 필요한 비용을 대어주라고 명한다. 뭐, 이런 이야기다. 성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비슷한 일이 당시 조선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청나라에 1년에 몇 차례 사신단을 파견했던바, 사신단은 서울과 북경을 왕래하는 동안 막대한 비용을 소요했다. 이 비용은 조정에서 지급하지 않고, 사신단이 지나가는 고을에 요구하고, 이것을 ‘구청(求請)’이라 부른다. 고을 수령들은 이 돈을 어디서 마련하겠는가? 당연히 백성을 짜낸 것이다. 성호는 구청의 폐단에 대해 좀더 밝히고 있다.
이 폐단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국초(國初)의 제도는 아니다. 이런 제도가 있는데도 어떻게 수령들의 사적인 뇌물을 금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적으로 요구하고 사적으로 주는 것이 필경 어디서 나오겠는가? 백성에게서 나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외방원〔稅外方圓, 상세(常稅) 외에 바치는 재물〕인데,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늘어나 다른 경우도 모두 이것을 보고 따라한다. 그래서 서울의 관청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지방 고을에 공적으로 징수하는 것을 관례로 삼으니, 만약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망칠 단서가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구청의 관례를 본받아 서울의 관청에서도 무언가 일이 있으면 지방 고을에 공공연히 비용을 요구한다. 원래 법에 정해진 세금으로 경작하는 땅에 매기는 전세(田稅)가 있지만, 그 외에 어떤 일로 인해 임시로 걷던 물자가 세월이 가면서 정식 세금이 된다. 한 가지가 전례가 되어 또 다른 예를 만든다. 이런 식으로 국가가 법 밖의 세금을 수령들에게 거두어들인다면, 그 결과는 빤하다. 수령들이 백성을 착취하고 조정의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있을 것인가. 이런 식으로 조선은 전세 외에 환곡이니 군포니 하는 명목으로 세금 아닌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거기에 구청 따위의 오만가지 명목을 덧붙여 백성을 쥐어짰다. 수입이 들어오는 길은 수십 수백 가지로 나뉘어 있었고, 따라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복잡하고 다양한 세원들은 관리가 불가능하다. 당연히 부패의 소굴이 된다. 성호의 말처럼 사대부 체제는 백성을 한없이 착취하다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그 부패의 사례를 한번 보도록 하자. 그 좋다는 평양감사의 경우다. 성호는 「감영 창고(營庫)」(8권, 인사문)에서 감사의 재정을 전횡하는 권력을 이렇게 고발한다.
지금의 감사(監司)는 재물을 제 마음대로 쓰고 있지만, 조정에서는 도무지 모른다. 재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인데도, 백성을 쥐어짜는 무리가 제욕심만 채우고 자신을 살찌우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제도에, 감사가 있으면 반드시 판관(判官)이 있다. 그러나 감사와 판관은 각각 창고를 갖는다. 판관은 감사를 공봉(供奉)하지만 (감사의) ‘감영 창고’에 대해서는 간여할 수 없다. 영고는 국가의 내탕고(內帑庫)와 같은 것이다. 내탕고란 것도 옳지 못한 것이거늘, 하물며 영고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지금 마땅히 법을 세워 감사가 비록 재부(財賦)를 총괄은 하더라도 반드시 판관이 관장하게 하여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또 판관이 지위가 낮으면 관장(官長)의 불법을 바로잡을 방법이 없을 것이니, 판관의 품계를 고려의 안렴부사(按廉副使)처럼 좀더 높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백성도 좀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감사 아래에 판관이 있고, 두 사람은 각각 모두 창고를 갖는다. 판관은 감사를 받들어 행정 사무를 보지만, 감사의 창고만은 간여할 수가 없다. 임금에게는 내탕고란 금고가 있는데, 임금 개인의 용돈 창고다. 내탕고는 신하들이 전혀 손을 댈 수 없는 사금고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국가를 소유하고 있는 왕이 내탕고를 가지는 것이 말이냐 되냐고 비판했지만 임금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감사의 창고 역시 감사가 마음대로 집행하는 내탕고다. 어떤 권력도 손댈 수가 없다. 보통 관리는 감사로 있을 때 한몫 단단히 챙긴다고 보면 된다. 예컨대 정조 즉위년 평양 감사로 있던 조엄은 60만 냥을, 황해 감사였던 홍술해는 12만 냥, 원의손은 전라 감사로 있을 때 10만 냥을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2냥에서 4냥 정도였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횡령액이다. 이런 부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문이 결딴이 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위 부패 3인방 중 조엄의 가문은 뒷날 왕비(신정왕후, 1808~1890, 익종의 비, 헌종의 어머니)를 내면서 풍양 조씨 세도가문이 된다.
성호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자는 계책을 제시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도 그 계책은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백성에 기대고 백성은 재물에 의지하는 법이다. 재물이 바닥나면 백성이 쇠약해지고, 백성이 쇠약해지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 이것은 알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지금 위로는 고관대작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유생까지 누군들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만들어주자고 말하지 않으랴마는, 한 가지 정사(政事)도 단행되는 경우를 보지 못한다. 살림을 넉넉하게 만드는 방도는 탐오를 금하는 데 달려 있다. 탐오는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가죽을 벗겨 제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청렴과 탐오(廉貪)」, 11권, 인사문〕
위로 고관대작부터 아래로 벼슬하지 않은 유생까지 누구나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만들어주자고 말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도 시행된 적이 없다. 성호는 그 좋은 계책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백성을 착취해 사복을 채우는 탐오가 먼저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탐오는 금지되지 않는가. 탐오해도 아무런 처벌이나 제재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청렴과 탐오」를 계속 읽어본다.
이제 내가 본 바를 들어보겠다. 우리 마을에 높은 벼슬을 지내고 청백리로 뽑힌 분이 있었다. 그분은 청렴했기에 가난했고, 가난했기에 자손이 살던 곳을 떠나 떠돌게 되었다. 게다가 사사로운 이익의 길을 뚫지 못해 백여 년이 지나도록 박한 녹봉을 받는 기회도 가질 수 없었고, 거의 모두가 굶주려 도랑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청백리는 후손을 위해 재산을 모을 수 없다. 가난을 물려받은 후손을 그 선조를 본받아 사사로운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가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다. 백여 년이 지나도록 미관말직도 얻지 못하고, 거의 다 굶어죽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탐관오리들은 어떤가.
같은 시기에 백성의 살가죽을 벗기고 기름을 짜내어 좋은 전답과 집을 마련하고, 기세를 돋우고 이름을 날리며, 벗들과 사귈 때 의기양양 굴어 세상 의론의 중심에 서고, 높은 벼슬에 올라 후한 녹봉을 받는 자와 저 청백리를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 크다.
하기야 지금 세상에 탐관오리를 다스리는 법 또한 엄하기는 하다. 자손까지 벼슬길을 막아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법일 뿐이다. 어디 저 대소 관원을 한번 보라. 집은 높고 밝으며, 노비는 피둥피둥 살이 쪄 있지 않은 경우가 없다. 하지만 한 사람도 법에 걸려 죽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온 세상 사람에게 얼음물을 마시고 소태나무를 씹으며 살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법의 그물을 벗어난 자가 지나치게 많은 것 같다.(「청렴과 탐오」)
아무리 탐오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탐관오리가 그치지 않은 이유다. 성호는 청렴한 관리를 선발해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고, 그 후손들을 등용하여 벼슬이 끊이지 않게 하자는 안을 내놓는다. 별로 신통한 대책도 아니지만, 이것도 시행되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 어떠신가?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는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부패한 자가 출세하고, 양심을 지키고, 청렴하게 사는 것은 오늘날 여전히 불편하고 소득이 없는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서 그친다. 성호의 말이 오늘날 여전히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