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망하자는 사람들
유가(儒家)를 자기 세계관으로 삼는 사람, 곧 유자(儒者)는 기본적으로 정치를 지향한다. ‘讀書曰士 從政曰大夫.’ 곧 글을 읽으면 선비,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는 말이 있듯, 유자는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정치에 종사한다. 그것이 유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이다.
그 정치는 당연히 민(民)을 대상으로 하고, 궁극적으로 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 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별스런 것이 아니다. 성호는 “만약 백성을 이끌어 생업을 경영하게 하되, 그들의 노력을 해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윗사람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살길을 여는 지혜가 갖게 될 것이다”〔「청렴과 탐오(廉貪)」, 11권, 인사문〕라고 말한다. 좀더 상론해 보자.
‘백성의 숫자가 불어나면 부유하게 해주어라’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인데, 부유하게 해준다는 것은 재물을 직접 나누어준다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재물을 쌓고 모으게 만들고 나라에서 탐학하게 굴면서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늘에 밝은 빛이 있으면, 백성이 어둡게 지내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백성들은 알아서 창을 내어 밝은 빛을 취할 것이다. 땅에 재물이 있다면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백성들이 알아서 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 스스로 부유하게 될 것이다.
한(漢)나라 조정에서는 오직 복식(卜式)만이 이 방법을 깨쳐, 염소를 칠 때 “그 무리에 해를 끼치는 놈을 제거합니다” 하였고, 하늘이 가물자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신하를 삶아 죽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렇게 한다면, 백성이 어찌 부유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백성의 가난(民貧)」, 16권, 인사문〕
염유(?有)가 공자에게 물었다. 백성의 수가 불어났다면 이제 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 그들을 부유하게 해 주어야지. 그럼 부유하게 만들었다면, 다시 또 무엇을 할까요? 그제는 그들을 가르쳐야지. 성호는 여기서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을 파고들었다. 어떻게 부유하게 만들 것인가. 그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랴? 아니다. 착취를 멈추어라. 백성은 알아서 일하고 재산을 모을 것이다. 밝은 빛이 있으면 창문을 내어 그 빛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백성들은 알아서 농토를 갈고 길쌈을 하여 부유해진다. 나는 『성호사설』의 이 부분이 가장 좋다. 통치자 없는 백성들의 자율적인 사회! 이보다 더 좋은 사회가 있을 것인가.
하지만 성호의 희망이 이루어진 날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단 하루도 없었다.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대부 체제 자체가 농민의 수탈을 전제로 하여 성립한 체제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약간 빗나가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을 읽으면서 실소할 때가 종종 있다. 왕과 조정의 중신들이 백성의 구제책이라면서 이런저런 조치를 하고는 대단한 일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조정을 구성하는 양반관료와 지주 들이 백성을 착취하지 않았다면 구제니 뭐니 할 것도 없건만, 온갖 방법으로 백성을 착취하고는 다시 구제를 한다니 희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백성, 곧 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도로 진행되면 어떻게 되는가. 생산을 맡은 사람이 자신이 노동한 결과물을 갖지 못할 때, 또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없이 모순이 영속화해버렸을 때 농민은 ‘이 나라, 이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호는 「같이 망하자(偕亡)」(26권, 경사문)란 글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백성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으니, 이 말은 비단 군자만이 힘써야 할 것이 아니고, 소인도 또한 이치가 마땅히 그런 줄을 안다. 그러므로 「탕서(湯誓)」는 하(夏)나라 백성의 말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하나라 왕이 백성의 힘을 깡그리 끊고, 하나라 고을을 박할(剝割)하니 백성들이 게을러 화합하지 않고서 ‘저 해가 언제나 없어질까? 나는 너와 함께 망해버렸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백성들의 힘을 깡그리 끊는다’는 것은,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를 힘써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고, ‘하나라 고을을 박할한다’는 것은, 원래 정해진 세금 외에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부모처자를 양육할 도리가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 있는 힘을 다 짜내도 먹고살 수가 없게 되면, 백성은 자기 생업에 게을러지고, 원망하고 성을 낼 뿐 화합하지 않는다.
성호는 『서경』을 인용해 이 글을 끌고 나간다. “백성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의 한 구절이다. 두번째 인용은 「탕서」의 ‘하나라 왕이…’ 이하의 구절이다. 이 구절의 화자는 은(殷)나라 탕왕이다. 그는 폭정을 일삼는 하나라 걸왕(桀王)을 쳐부수기 위해 박(?)이란 곳에 군사를 모아놓고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정당화하는 연설을 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그 연설의 일부다. 그 구절을 해석하면 이렇다. “하나라 왕은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만들고, 정해진 세금 외에 별별 명목으로 백성을 착취하였소. 백성들은 이제 일할 의욕을 잃고 마냥 놀며 이런 소리를 하였소. ‘저 해가 언제나 없어질까? 나는 너와 함께 망해버렸으면 좋겠구나.’” 해는 폭군 걸왕이다. 가렴주구에 시달린 백성은 저 해가 언제 사라질 것인가, 나도 너와 함께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성호는 이 부분을 의미심장하게 인용한다. ‘백성들의 힘을 깡그리 끊는다’는 문장을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를 힘써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하나라 고을을 박할한다’는 것은, 원래 정해진 세금 외에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부모처자를 양육할 도리가 없게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더 풀어보면 농사를 지을 시기에 궁궐을 짓거나 전쟁 따위에 끌고 나가고, 정해진 세금 외에 온갖 명목의 세금을 거두어 살길을 막아버리자, 백성은 노동 의욕을 잃고 오직 나라가 망하기만을 바란다는 뜻이다.
백성은 요즘으로 치면 국민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한 국민의 수가 늘어나면 국민의 통합이란 것이 희미해진다. 한국사회는 지금 급격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방치하면, 국민은 극소수의 부자와 절대다수의 빈자로 나뉠 것이다. 사회적 이동성이 극히 낮아져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고, 부자와 빈자는 일상에서 거의 만나지 않게 된다. 생활 수준과 문화, 교육 등이 분리되고 심지어 언어까지 달라질 것이다. 이중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중 국가가 되면, 가난한 자들은 나라가 망한다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 국가권력은 내셔널리즘을 동원하여 양자를 통합하려 할 것이다. 김연아, 월드컵 같은 스포츠가 그런 구실을 떠맡겠지만, 그것이 기만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듣기 이상할지 모르지만,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려 들었을 그 무렵 뜻밖에도 일본 사람을 환영한 조선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신념이 앞서서가 아니었다. 어느 날 상놈 하나가 일본인의 통역이 되어 일을 해보니, 상것인지 천민인지 묻지 않고 일한 대로 꼬박꼬박 임금을 준다. 근대적 합리성이 부분적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양반들에게 멸시를 받아가며 살던 사람들로서는 뜻밖이다. 급기야 일본인을 찬미하고 친일하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나라를 구제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 된다. 예컨대 채만식의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은 양반들의 가렴주구가 없고, 화적떼가 없는 일제 식민지 시기를 공명한 정사가 펼쳐지는 ‘태평한 천하’로 알았던 것이다. 사회 통합에 실패한 국가의 국민이 어떤 의식을 갖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성호는 「같이 망하자」에서 『서경』의 「중훼지고(仲?之誥)」의 일부를 인용한다. 「중훼지고」의 말은 이러하다. “우리 임금을 기다렸더니, 우리 임금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아나려나 보다.” 중훼는 탕왕의 신하다. 탕왕이 걸왕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신하 중훼는, 학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탕왕을 반기며 이런 말을 했다고 그에게 전한다. 성호는 이 글을 인용해 “백성이 망하려다가 다행하게도 되살아난 것이다. 우연히 이런 생각이 나기에 적어두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 역시 그렇다. 양극화와 이중 국가 문제를 지금 심각히 고민하지 않으면, 앞으로 타국의 침략을 호기로 여겨 「중훼지고」의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도 나올지 모른다. 두려운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