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게 물어라
성호는 「나무를 심으면 뿌리에 물을 주라(種樹漑根)」(16권, 인사문)라는 글에서 가뭄에는 나뭇잎이 마르기 전에 뿌리에 물을 주라고 한다. 말 못하는 나무라 죽어가는 줄을 모른다. 해서, 잎사귀가 마른 것을 보고 물을 줘도 소용이 없다. 백성도 그와 같다. 백성들은 흩어져버렸고,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굶주림과 추위에 살아갈 마음이 없다. 딱한 사정을 호소하려 해도 저 멀고 깊은 구중궁궐에 어떻게 호소할 것인가. 간혹 말하는 자가 있어도 흔히 하는 진부한 이야기로 흘려듣고 만다. 백성은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부르는 명사다.
세상은 늘 다스리는 자, 다스림을 받는 자로 구성되어왔다. 다스리는 자는 기본적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성호는 그래서 “군자는 위에 있고, 소인은 아래에 있다. 세력과 지위가 서로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으니, 오막살이에 사는 백성들의 근심과 괴로움을 무엇을 통해 알겠는가?”〔「백성을 제사 지내듯 부리라(使民如祭)」, 18권, 경사문〕라고 말한다. 이 문제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이 과연 국민을 알겠는가? 민주사회니까, 언론의 자유가 있으니까, 매스컴이 있으니까, 여론조사가 있으니까, 정치권력을 쥔 세력이 국민의 속내를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망상에 가깝다. 재산과 학벌을 배경으로 한 정치인들은, 그들이 입에 올리는 ‘서민’을 모른다. 매일 귀족의 삶을 살고 있으니 평민을 알 턱이 없지 아니한가.
궁궐 속에 갇혀 있는 조선시대의 왕은 백성을 직접 대면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비교적 성실한 왕으로 평가받는 영조와 정조 등 몇몇 왕들이 드물게 백성을 대면했지만, 백성이 그 기회에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문고, 격쟁(擊錚) 등의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도 잘못 쳤다가는 곤장을 맞거나 귀양을 가는 수가 있었다.
성호는 통치자가 백성을 만나지 않은 것을 정치의 큰 오류로 지적한다.
겹이불을 덮고 수탄(獸炭, 석탄을 가루를 짐승 모양으로 뭉쳐 만든 땔감―필자)을 땔 때면, 천하에 몸이 얼어붙는 사람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하고, 화려한 집에서 푸짐한 음식을 차릴 때에는 천하에 굶주림을 참는 자가 있는 줄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이 안락할 때는 천하에 노역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하고,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 기분이 좋을 때면 천하에 원한을 품고 억울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백성을 제사 지내듯 부리라」)
자신은 만족스럽다 할지라도 언제나 고통에 빠져 있는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백성을 가까이 하라」(17권, 인사문)에서 성호는 이렇게 말한다.
백성을 어떻게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인가? 때때로 유예(游豫)하여, 경우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백성을 접하되 온화한 얼굴로 그들을 이끌고, 일을 구실로 삼아 백성을 찾아보되 마치 친구처럼 반갑게, 부자지간처럼 살갑게 한 뒤라야 아래에 있는 백성의 사정이 위에 통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가까이 하란다. 가까이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수시로 유예(游豫)하란다. 유예는 원래 돌아다니면서 노는 것이다. 맹자는 이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그냥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 아니다. 봄가을로 돌아다니며 백성들이 밭갈이 하고 수확하는 데 무언가 부족한 것, 불편한 것은 없는지를 살피고 도와준다. 놀긴 놀되, 백성의 사정을 돌아보는 일로 돌아다니면서 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백성을 만나러 간다고 하지 말고, 백성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그것을 구실 삼아 찾아가란 것이다.
성호는 특히 왕이 백성을 만날 때 온화한 낯빛으로 친구가 된 것처럼, 또는 부모 자식처럼 반갑고 살갑게 대하라고 요구한다. 갑자기 민생 탐방이니 뭐니 하면서 미리 경찰을 보내 주위를 샅샅이 뒤져 ‘청소’한 뒤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나지 말란 얘기다. 성호는 특히 이 부분을 비상하게 강조한다. 그는 같은 글에서 『시경』 ‘위풍’의 「기욱(淇奧)」이란 제목의 시를 인용한다.
寬兮綽兮 너그럽고 여유 있으신 태도로
?重較兮 아, 수레를 타고 다니시네.
善戱謔兮 희학을 잘 하시나,
不爲虐兮 지나치지 않으시네.
이 시는 위나라 무공(武公)의 덕을 찬미한 노래라고 한다. 물론 이 시의 해석에는 난삽한 문제들이 여럿 있지만, 시경학(詩經學)을 공부하는 자리가 아니니 일단 덮어두자.
성호는 이 시가 무공이 수레를 타고 길거리를 돌아보면서 백성을 만나는 ‘유예’의 실례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시의 핵심은 무공이 희학, 즉 농담을 잘했으나 그것이 지나치지는 않았다는 뒷부분에 있다. 성호의 상세한 해설은 이러하다. “옛날의 어진 임금은 반드시 백성을 불러 앞에 오게 하고는 온갖 방법으로 설득하여 그들이 자기 사정을 다 털어놓게 하였고, 혹 그렇게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일부러 우스갯소리를 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사정을 즐거이 고하여 유감이 없게 한 것이다. (…) 이러니 어찌 백성들 중에 물동이를 뒤집어쓴 것 같은 억울함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왕은 국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다.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왕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우스갯소리까지 하면서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라고 달랜다. 요즘으로 치면, 네티즌의 발언에 발끈해서 고소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권력을 쥔 자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백성을 가까이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할 것인가. 성호는 「백성에게 물어라(詢民)」(18권, 경사문)의 모두에서 “왕의 좌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모두 유능한 사람이라 해도 안 되고, 모든 대부(大夫)가 유능하다고 해도 안 되고, 국인(國人)이 모두 유능한 사람이라고 한 뒤에야 비로소 그를 등용한다”라는 『맹자』의 한 구절을 인용한 뒤, “국인이란 서민이다. 서민의 말이 어떤 방법을 통해 위에 전달되기에 반드시 서민이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기다려 결단하라는 것인가?”라고 말한다. 서민, 곧 백성의 말을 받아들이는 어떤 구체적인 루트가 있냐는 말이다. 성호는 『주례(周禮)』 추관(秋官)의 「조사(朝士)」와 「소사구(小司寇)」에서 그 근거를 찾아낸다.
조사(朝士)는 외조(外朝)의 법을 관장한다. 왼쪽 아홉 그루 가시나무를 심은 곳에 고(孤)ㆍ경(卿)ㆍ대부가 자리를 잡고, 모든 사(士)들은 그 뒤에 선다. 오른쪽 아홉 그루 가시나무를 심은 곳에는 공작ㆍ후작ㆍ백작ㆍ자작ㆍ남작이 자리를 잡고, 모든 이(吏)는 그 뒤에 선다. 앞쪽 홰나무 세 그루를 심은 곳에는 삼공(三公)이 자리를 잡고 주장(州長)과 뭇 백성들이 그 뒤에 선다. 왼쪽의 무늬 있는 돌을 깔아놓은 곳에서는 허물이 있는 백성들이 뉘우치게 하고, 오른쪽 붉은 돌을 깔아놓은 곳에서는 궁한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한다.
소사구(小司寇)의 직임은 외조의 정사를 관장하는 것이니, 모든 백성이 오게 하여 그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첫째는 나라의 위험함에 대해 묻고, 둘째는 나라를 옮기는 것에 대해 묻고, 셋째는 임금을 세운 것에 대해 묻는다. 각자의 위치로 말하자면 임금은 남쪽을, 삼공(三公)과 주장(州長)과 백성은 북쪽을, 여러 신하는 서쪽을, 여러 이(吏)는 동쪽을 향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임금을 보좌하여, 임금이 그중 좋은 의견을 따르게 한다.
읽어보건대, 백성들에게 말을 할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백성들은 자신들의 궁박한 처지를 호소함은 물론, 실제 나라의 안위와 천도, 임금을 세우는 것과 같은 중대한 국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호는 이 제도를 두고 옛 성인의 빈틈없고 치밀한 제도가 이와 같았지만, 후세에는 권력자나 그에 빌붙은 측근이 독재를 행해, 아래에 있는 백성들에게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어도 정치하는 사람에게 전달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민주주의의 급속한 퇴락을 보고 있자니 성호의 탄식이 더욱 새롭다. 혼자 똑똑한 사람은 없다. 국민을 위한 정치라면, 국민에게 물어라. 겸손하게!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