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관료들의 세상
성호는 「쓸데없는 관리를 없애야 한다(罷冗官)」(14권)란 제목의 글에서 필요 이상의 관료가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논하고 있다. 성호는 한(漢)나라 때는 벼슬에 맞게 사람을 뽑았으므로 자리는 부족한데 사람이 넘치는 문제가 없었지만, 과거제도가 생기고부터 쓸데없는 관료가 늘어났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과거제도는 관직의 수는 고려하지 않고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관료 후보자를 뽑았기에 결국 관료의 자리 수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만이 아니다. 자신은 고위관직을 지냈지만, 아들은 멍청해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문음(門蔭)이란 길을 열어둔다. 조상이 높은 벼슬을 지내면 그것을 국가에 공이 있는 것으로 여겨, 과거에 합격하지 않은 자식도 벼슬을 할 수 있도록 따로 문을 하나 열어놓은 것이다.
문이 한 번 열리자 문제가 폭발한다. 송대에 이르자, 포대기에 싸인 젖비린내 나는 아이까지 관복을 입는 희극이 벌어진다. 당연히 유능한 인재는 재야에서 썩는다. 관료가 늘어난다 해서 재정이 따라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성호는 “말 먹이는 사람이 꼴과 콩이 축이 나는 것을 염려해 마구간 지기를 두었더니 말이 더욱 수척해졌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바,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할 관료를 더 두자는 말을 따르면, 결국 재정 부족이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성호는 쓸데없는 관료의 증가에 대해 중국의 역사를 인용하지만, 정작 그가 겨누고 있는 것은 조선 쪽이다.
우리나라는 본디 땅은 좁고 관리는 많다고 알려져 있다. 땅이 좁으면 재물이 넉넉하게 나지 않고, 관리가 많으면 토색질이 풍조를 이룬다. 백성은 더욱 빈곤해지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당나라 송나라가 가졌던 넓은 땅이 없는데도 사람을 위해 벼슬자리를 늘리는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내외의 벼슬자리는 이미 문과 무과 출신의 수를 채우지 못한다. 여기에 유품(流品)으로 벼슬길에 들어가는 길도 너무나 넓게 트여 있어, 권귀(權貴)의 자제들은 미친 자나 멍청이 할 것 없이 벼슬이 없는 자가 없고, 그들과 혼인을 맺거나 벗이 되어 사귀는 자, 그리고 빌붙어 알랑거리는 자도 벼슬에 오르지 않는 경우가 없다. 일단 사모(紗帽)만 쓰면 수령 자리는 따놓은 당상으로 알지만, 그래도 혹 승진이 미뤄질까 걱정하여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지름길로 벼락승진을 하려고 몸부림을 친다. 문신 출신의 음관(蔭官)들은 일거에 한몫을 챙기려는 한 생각에 허구한 날 마음을 졸이는 자가 수천 명이다. 물론 무신 쪽은 이 수에 치지도 않았다. 3백 곳이 조금 넘는 고을로 이 한없이 많은 사람들의 탐욕을 채우기란 실로 어렵다.(「쓸데없는 관리를 없애야 한다」)
관직을 향해 너나 없이 몰려드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백성의 거죽을 벗기고 뼈를 바르는 가렴주구, 곧 토색질을 통해 일거에 벼락부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쩔 것인가. 조선은 중국과 달라 땅은 좁고 재물이 넉넉하지 않다. 조선의 지방수령직(예컨대 군수나 현감)은 3백 자리가 조금 넘는다. 이 자리는 수많은 관료 후보자들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성호의 지적은 조선이란 관료국가의 본질적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서리 무리의 명칭(胥徒名號)」(14권)에서 성호는 이 점을 더욱 신랄하게 파고든다.
천하의 벼슬자리를 차지하려고 애달캐달 구는 자들은 너나 없이 사리(私利)를 채우려는 자들이다. 오직 공정하고 청렴한 한 마음으로 백성의 후생에 뜻을 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성호는 관직을 구하는 사람이 모두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려는 자들이라고 한다. 지나친 말인가?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의 관료의 봉급은 입에 겨우 풀칠을 할 정도다. 그럼에도 관직에 목을 매다시피 하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되어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부정적 수입이 풍부하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백성의 후생에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관료가 있었다면 아마도 예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이란 국가의 관료조직은 본질적으로 거대한 착취 기관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그들을 왕으로 관료로 섬긴다고 동의해주었더란 말인가. 『실록』을 읽어보면 조정에서는 당쟁으로 날과 밤을 지새운다. 예컨대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1, 2차 예송(禮訟)이 논에서 김을 매는 백성들에게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인가. 왕과 왕비가 상복을 3년을 입을지, 1년을 입을지, 9개월을 입을지를 두고 관료들끼리 목숨을 걸고 치고받았지만, 그 역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더러운 싸움일 뿐이었다. 하기야 조정 일각에는 백성들을 향한 통치와 행정이 있었고, 그것은 표면상 선량한 언어로 이루어졌지만, 그 선량한 말씀들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실행되는 경우란 실로 드물었다. 만약 그 선량한 말씀이 그대로 실행되었으면 유민과 도적이 나타날 리 없었고, ‘황구첨정(黃口簽丁)’이나 ‘백골징포(白骨徵布)’ 같은 어휘도 사라졌을 것이다.
문제는 관료제 자체에 있었다. 성호는 다시 말한다.
그들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려는 마음이다. 그나마 힘이 부족해서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 만약 힘이 넉넉하다면 단연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수를 많게 늘릴 필요가 있으랴? 지금 서울 각 관청의 쓸데없는 관원은 차치하고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원조차 정해져 있지 않은 수많은 서리들은 한갓 무익한 존재가 되어 있을 뿐인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불러대고 부려먹기를 마음대로 하고, 올려주고 내쫓고 하는 것이 무상하다. 저들 역시 소속 관청의 업무에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고, 오직 기회를 엿보아 백성을 괴롭힐 궁리만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 역시 살아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서리 무리의 명칭」)
너무 과한 표현인가. 하지만 조선시대 사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결코 과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영조 1년(1725) 7월 10일 경연에서 참찬관 유복명은 『경국대전』에 47명으로 정한 형조 서리가 140명으로 불어나, 재판을 조작하고 체포를 구실로 삼아 백성의 고혈을 빨고 있다며 그 수를 『경국대전』의 정원으로 줄일 것을 왕에게 요청하고 있다(『영조실록』). 이것은 비단 형조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영조 때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거의 만성적인 일이었고,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는 일이었다.
성호는 대책을 낸다. 그는 무엇보다 강하고 무거운 권력을 쥔 자리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울러 유사한 성격의 관청이나 지방행정 단위를 통합하고, 결원이 나도 필요하지 않은 경우 보충하지 않음으로써 쓸데없는 관리를 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던가. 조선조 말까지 성호의 아이디어는 결코 채택되지 않았다.
성호의 글을 읽으며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의 관료들을 떠올려본다.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일부를 제외하면, 그들은 윗자리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보수성이 짙어지고(아니, 수구적이 되고), 국민 대중과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신과 승진, 그리고 관료조직 자체를 비호하는 데 골몰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작은 정부를 외치지만 어느새 관료조직을 커져 있다. 제도와 규정을 만들어 사람을 통제하려 하거나, 상대방이 약하다 싶으면 군림하려 한다. 자신이 대리하고 있을 뿐인 국가 권력을 마치 자기의 권력인 것처럼 여기고 그 권력으로 사적 욕망을 채운다. 그럼에도 관료를 감시할 기구는 거의 없다. 관료가 세운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어도 그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해괴한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