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열사회
조선사회가 신분사회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신분간의 구분이 엄격했던 것은 아니었다. 천민은 일단 제외되지만, 양인 이상이면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으니, 양반과 양인의 본질적 차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양반 중에서 서얼을 차별하기 시작하고, 양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상민이 차차 벼슬길에서 제외되어, 양반사족과 구분되었던 것이다.
성호는 그런 사정을 「상(尙)ㆍ구(丘)ㆍ반(潘) 세 성씨」(10권)란 글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따라 읽어보자. 성호는 “벌열(閥閱)을 숭상하는 풍습은 국초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풍속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임금도 그렇게 인도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즉 벌열을 숭상하지 않는 풍습은 신하와 임금 모두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성호는 먼저 상진(尙震, 1493~1564)의 경우를 든다. 상진은 1519년(중종 14년)에 과거에 합격한 이래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여 우의정을 좌의정을 지내고 1558년 영의정이 된다. 대개 조선조의 명재상을 꼽으라면 황희와 상진을 꼽는다. 상진은 목천 상씨다. 한데, 목천 상씨는 상진 외에는 고위관료를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 그의 집안은 중종 때도 그리 유명한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다(지금도 상씨는 희성이다). 성호는 이것을 두고 “영상 상진이 선음(先蔭)에 기대지 않고 신하로서 가장 높은 벼슬까지 올랐다는 것은 누구나 듣고 아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선음은 선조의 음덕이니, 그는 가문의 배경이 없이 출세를 했던 것이다.
같은 글에서 성호는 구종직(丘從直, 1404~1477)의 경우를 더 든다. 구종직은 과거에 합격한 뒤 우연히 미행 중인 성종의 눈에 띄어 발탁된다. 전공이 무엇이냐는 성종의 물음에 『춘추』라고 대답했고, 이어지는 성종의 물음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성종은 구종직을 홍문관 수찬으로 발령을 냈다. 삼사(三司)에서 출신이 미천하다고 논박하자, 성종은 삼사 관원과 구종직을 함께 불러 『춘추』를 시험한다. 결과야 불문가지다. 삼사의 관원은 침묵했고, 구종직은 출세 가도를 달려 좌찬성까지 지낸다. 평해 구씨 역시 지금 희성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람은 반석평(潘碩枰, ?~1540)이다. 성호에 의하면 그는 재상집 종이었으나 그 재주를 아낀 재상이 공부를 시키고 아들 없는 부잣집 양자로 넣어 미천한 출신을 묻어버린다. 반석평은 1507년(중종 2년)에 과거에 합격한다. 사간원에서 그의 출신 성분을 헤집었지만, 그것이 관료로의 출세에 장애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반석평은 청백리로 유명했고, 좌찬성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대개 임진왜란 이전이다. 성호는 「족성(族姓)을 숭상하지 않음(不尙族姓)」(12권)에서, 임진왜란 이후 집안 배경을 고려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중고 이전에는 족성(族姓)을 숭상하지 않았다. 각각 재능과 학문으로 진출했으므로 미천한 출신으로 현달한 사람이 있었다. 근래에는 대관(臺官)들의 탄핵과 공격으로 말하자면 오로지 문벌과 지체가 한미한 것을 최상의 제목으로 삼을 뿐이고, 사람의 재능과 도덕성이 어떠한지는 따지지 않는다. 알 수 없다만, 맑은 조정의 빛나는 벼슬 자리가 깡그리 벌열가 자제들을 위해 만든 것이란 말인가.
대관들이 지탄하고 배격하는 것이 문벌과 지체의 한미함을 최상의 제목으로 삼을 뿐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관직에 추천되면 사헌부의 관리들이 그 사람의 집안 배경이 보잘것없다면서 비판하여 벼슬길을 막는다는 뜻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희한한 소문을 떠올린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중하위권 대학이나 지방대학 출신이 대기업에 입사서류를 내면 인사담당자가 보지도 않고 서류를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린다는 소문 말이다. 나는 그것이 근거 없는 소문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특정한 대학을 제외한 서울 소재의 대학은 ‘잡대’로, 지방대학은 ‘지잡대’로 부르는 저열한 언어 관행이 있는 한 그것은 소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말이 옆으로 샜다. 중요한 것은 사헌부 관리들이 왜 끼어드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5품 이하의 관원을 임명할 때, 해당 인물이 자신의 내외(內外) 4조(祖)와 아내의 4조의 이름, 문벌, 이력 등을 적은 문서를 사헌부와 사간원에 제출한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제출된 서류에서 해당 인물과 그 집안의 하자 유무를 조사한다. 이 과정을 서경(署經)이라 하는데, 범죄 등 결격 사유의 유무를 조사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해당 인물의 능력은 제쳐놓고, 오직 집안이 시원치 않다면서 관직 임명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성호는 이렇게 비판한다. “다만 문벌만 보고 재능과 도덕성은 살피지 않는 이런 법은 마땅히 빨리 없애야 할 것이다. 조그만 흠이 있다 해도, 어찌 문벌을 가지고 저 유능함을 덮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상ㆍ구ㆍ반 세 성씨」)
성호는 이렇게 비판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나라 풍속은 벌열만을 전적으로 숭상하여 사환가(仕宦家)의 자제가 아니면, 아무리 학문이 정자(程子), 주자(朱子) 같고, 무예가 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과 같다 해도 사람들이 천시하여 버리고 만다.”(〔「유극량(劉克良)」, 15권〕라고 한 것처럼, 일단 문벌, 곧 집안 배경이 없으면 학문이 아무리 탁월해도, 무예가 아무리 뛰어나도 버림을 받을 뿐이었다. 성호는 『성호사설』 곳곳에서 이 문벌주의를 비판한다. 그리고 한탄하고, 절망한다.
지금 우리나라 풍속은 종족의 부류를 구별하여 노비와 천민은 백 세대가 지나도 영화를 누릴 길 없고, 높은 벼슬아치 집안 사람은 바보 천치도 무리를 지어 벼슬길에 오르니, 아아, 애달픈 일이다.〔「조명(造命)」, 3권〕
성호처럼 비판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성호는 주로 18세기 전반을 살았다(성호는 1681년에 태어나 1763에 세상을 떴다). 한데, 18세기 후반이 되면 벌열의 권력 독점은 더욱 가속화되어 불과 십 수 개 가문이 국가의 요직을 독점했고, 이들 가문에 끈을 대고 있는 자들만이 기름진 지방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는 곧 국가 권력의 사유화, 공적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졌다. 성호는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의 말을 끌어온다. “세상에 세 가지 서로 관계되지 않는 것이 있다. 과거는 원래 문장의 아름다움 여부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 여부는 정작 시험 결과와 아무 관계가 없다. 벼슬자리는 재능과 도덕성의 우열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그 우열은 정작 벼슬을 하는가 못 하는가와 아무 관계가 없다. 재판은 사리가 옳고 그른가에 따라 판결이 나는 것이지만, 정작 그 옳고 그름은 재판의 결과와 아무 관계가 없다.”(「족성을 숭상하지 않음」) 문장의 우수함은 합격 여부와는 상관없고, 인물의 능력과 도덕성이 관료가 되는 길이 아니며, 합리적 판단은 판결과는 관계가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곧 공적 시스템이 사유화된 권력에 의해 말살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벌열은 결국 국가를 사유화했다. 그들의 이익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었지만, 그들을 제어할 어떤 장치도 없었다. 성호처럼 소외된 양반들은 벌열의 권력 독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벌열 체제를 끝장낼 다른 상상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귀족사회가 되었다. 기득권을 쥔 소수가 돈과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그들끼리의 혼인을 통해 폐쇄적인 벌열집단이 되었다. 벌열은 곧 귀족이다. 정권이 바뀌든 말든 국가 권력은 그들의 소유물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국민이 골고루 국가권력을 나눠 가진 민주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 벌열사회, 귀족사회를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