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보다도 못한 정당
닭은 먹이를 찾노라고 다투며 쏘다닌다. 때로는 상이나 의자에 마구 몰려들기도 하고, 때로는 지팡이와 신발을 더럽히기도 한다. 몰아내 보지만, 그때뿐이다. 화가 나서 지팡이를 휘둘러본다. 간혹 맞아 다치는 닭도 있지만, 맞을 때 아픔은 잠깐이고 모이가 더 좋기에 다시 몰려든다. 쫓아보지만 물러가는 척하다가 다시 또 몰려든다. 성호의 「닭을 길러보고 당쟁의 이치를 알다(祝鷄知偏黨)」(6권)의 첫 부분이다. 성호는 닭의 행태를 보고 거기서 당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최근 『정조실록』을 통독할 기회가 있었다. 상대 당파 아무개의 이름을 들면서 역적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으라는 얘기가 없는 날이 없다. 우국충정이 넘친다. 당쟁을 이끌었던 당파의 맹장들이 쓴 글을 보면 정말 논리정연하고, 또 거기에 동원된 고전과 수사는 입을 다물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상대 당파의 사람을 내쫓고 죽이라는 주문이다. 유가의 고전이 살인의 언어로 전용된 것이다. 이렇듯 잔혹한 요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호는 말한다.
당파가 싸우는 것은 벼슬과 녹봉 때문이다. 때로는 혹 죄를 얻는 자도 있다. 죄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오직 바라는 것이 벼슬이기 때문에, 벼슬 얻는 것을 도리어 무겁게 여기고 죄를 짓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만약 벼슬을 끝내 더 얻지 못할 것을 안다면, 비록 죄가 가볍다 하더라도 반드시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후세 풍속은 대개 자벌레가 몸을 굽혔다가 펼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정말 죄를 지어도 복(벼슬)만 얻을 수 있다면 죽고 죽이는 것 외에는 무슨 일이든 달가운 마음으로 해치우는 데 골몰한다.
성호는 단정한다. 어떤 당파에 빠지는 것은, 오로지 벼슬과 녹봉, 곧 권력과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한 것이라고. 당파가 상쟁하는 과정에서 패배할 경우 매를 맞고 귀양을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아니,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꺼리지 않는다. 관직에 대한 욕망이 그 고통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성호는 죄를 지어도 벼슬만 얻을 수 있다면, ‘죽이고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조차 성호의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왜냐? 당쟁은 숱한 사람을 죽이지 않았던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상소문을 올리고 상대방을 탄핵하며 관직을 향해 몰려드는 인간의 모습은 모이를 향해 몰려드는 닭과 같다.
하지만 인간은 닭만도 못하다. 닭은 먹을 것을 다툴 때만 날개를 퍼덕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못하는 짓이 없다. 하지만 싸우다가도 먹는 일이 끝나면 언제 싸웠냐는 듯 여전히 좋게 지낸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긴 자도 진 자도 분노가 가슴속에서 들끓는다. 상대를 죽여버리고자 하여, 기회가 오면 잘못과 약점을 들추며 공격한다.
성호는 「쉽게 벼슬에 나아가는 사람(易進之人)」(10권)에서 소인배의 속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다. “소인배는 자신과 나라를 저울질해보고, 이익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면 잔인하게도 나라를 저버린다.” 구한말 매국인사들은 매국하는 것이 자신이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 순간 서슴없이 나라를 팔았다. 이것이 소인배의 정체다. 성호는 이 말, 곧 소인배가 자기 이익을 위해 나라도 저버릴 수 있다는 발언을 한 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붕당으로 맞추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붕당은 부귀를 누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짓거리다. 붕당을 만들어도 이익이 없다면 무슨 붕당이 생기겠는가?”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도 붕당은 결국 권력을 쥐고 부귀공명을 누리자는 술책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붕당의 결과는 백성에게는 재앙이 된다. 성호는 「당쟁의 습관은 난리를 부른다(黨習召亂)」(제8권)에서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의 말을 인용한다. “동인?서인으로 당을 나누어 서로 흥망을 거듭하면서 마치 대대로 원수인 것처럼 여겨 서로 협조하는 미덕이 없었기에, 나라 형편은 쇠락하고 풍속은 경박해졌다. 마침내는 밖으로부터 왜적이 침범하여 종묘와 사직이 폐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파는 자기 당파의 이익에 몰두할 뿐, 국가와 백성의 운명에는 결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이 성호가 윤국형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당파는 오직 자기 당파의 이익을 진리로 삼을 뿐이다. 합리적인 판단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성호는 「국시(國是)」(16권)에서 이 점을 비판한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하자. 나라 사람의 반은 그를 좋아하고, 반은 미워한다. 갑을 주장하는 자가 “이것이 국시다”라고 하면, 사의(私意)에 끌려 판단력을 잃고 그냥 옳다고 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을을 주장하는 자가 “이것은 국시가 아니다”라고 하면 사의에 끌려 판단력을 잃고 그냥 아니라고 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이 억지 주장을 하여 결정해버리면, 흡사 누런 잎사귀를 먹은 자벌레가 누렇게 되고 푸른 잎사귀를 먹은 자벌레가 푸르게 되는 것처럼 천만 사람이 부화뇌동하게 된다.
열 사람이 옳다 해도 한 사람이 그르다 하면 국시가 될 수 없거늘, 하물며 옳다는 사람이 열 명도 안 되는 경우야 말해 무엇 하랴? 게다가 붕당이 풍속을 선동하여 흑, 백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흡사 배를 타고서는 빙빙 돌며 남쪽 북쪽 위치를 바꾸는 것 같으니, 장차 어디로 따라가야 할 것인가. 때문에 스스로 ‘국시’라고 외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주장인 것이다.
국시란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가치가 아니다. 당파의 권력을 쥐고 있는 우두머리의 편견일 뿐이다. 나머지는 우두머리가 옳다고 하면, 무조건 옳다고 하면 그냥 옳다고 따르고, 그르다 하면 그저 그르다며 따를 뿐이다. 일개 당파의 우두머리의 사욕에 의해 나라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된다. “당쟁의 습관이 고질이 되자, 자기 당 사람이면 아무리 멍청해도 관중(管仲)이나 제갈량인 양 여기고, 가렴주구로 백성의 가죽을 벗겨도 공수(?遂)ㆍ황패(黃覇)*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당이 아니라면 모두 반대로 평가한다.”(「당쟁의 습관은 난리를 부른다」) 자기 당파 사람은 아무리 어리석어도 관중이나 제갈량 같은 천재로 여기고, 가렴주구로 백성을 착취하는 자도 양심적 목민관의 대명사였던 공수와 황패로 치켜세운다. 반대당이라면 물론 반대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당쟁은 소수 지배세력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백성과 나라를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한번 벼슬에 나아가고 한번 벼슬에서 물러가는 사이에, 자기 당파를 심는 데만 전적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정치의 올바른 이치는 관심 밖이니, 백성이 어찌 살 수가 있으며 나라가 어찌 다스려질 수 있으랴?”(「당쟁의 습관은 난리를 부른다」) 당파의 이익을 위한 당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과 나라에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은 당쟁을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전근대 사회 지배층의 권력 투쟁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유구한 민족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존재로 인해 붕당이 사라진 것으로 알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거대 정당은 정확히 붕당의 속성을 갖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의제는 국민 대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정치인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다. 정치인의 절대다수는, 국민 대다수를 위한 정치적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다. 국민의 정치적 권리는 일상에서가 아니라,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투표에서만 형식적으로 집행될 뿐이다. 그들은 권력을 잡는 데는 더할 수 없이 기민하고 교활하지만 정작 정치에는 무능하여, 대중에게 정치 혐오증을 불러일으킨다. 정치 혐오증은 국민에게 정치를 외면하게 하는, 거대 정당들이 침묵으로 합의한 카르텔의 산물이다. 한국의 거대 정당은, 붕당이 했던 일을 반복한다. 이성적 판단은 팽개치고, 오직 권력을 쥔 자기 정당, 혹은 정파의 구호만을 추종한다. 논리적 모순, 사실 왜곡은 다반사이며, 자기 정당 구성원이 저지른 범죄는 변명과 침묵으로 일관한다.
치명적인 것은, 한국의 거대 정당은 붕당처럼 정치적 상상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어떤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없다. 있다면, 지금처럼 거대 정당과 그 정당을 지지하는 계급의 이익이 영원히 보장되는 사회다. 문제는 대의제 자체에 있다. 몇 년마다 한 표를 행사하고는 다시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시스템이야말로 닭보다 못한 현대적 붕당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공수(?遂)ㆍ황패(黃覇): 한나라 때의 양심적이고 유능한 지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