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론의 귀결처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 부국강병론은 국가가 우리 머릿속에 설치한 가장 강력한 프로그램이다. 아마도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라는 이미지는 현재의 강대국과 동일할 것이다. 한데 한국의 역사에서 제국을 이룰 정도의 부국강병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일은 드문 것 같다. 고구려의 경우가 좀 다르다 하겠지만, 고구려는 ‘강병’은 어울리지만 ‘부국’의 이미지는 희박하다. 찬찬히 음미해보면, 부유하고 강력한 강대국에 대한 희망은 20세기 이후의 산물로 보인다. 곧 식민지로의 전락이 역으로 부국강병을 희망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교육 과정을 통해서 식민지가 되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다. 식민지 시대에 관한 기억 속에서 대한민국은 약소국이다. 하지만 또 기억의 한편에는 학교와 사회에서 끊임없이 설파한 영웅서사시로서의 국사 교육에 기원을 둔 강력한 고대국가의 이미지가 내면화되어 있다. 이 모순된 양자가 ‘부국강병’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국민소득과 무역 규모를 주워섬기며 세계 몇 위의 경제대국이라 떠들거나, 국제스포츠에서 메달의 순위에 열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국강병론의 변주인 것이다. 하지만 부국강병책의 결과 강대국이 되는 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인가에 대해서는 나는 적지 않게 회의적이다.
성호는 「상앙이 진나라를 망쳤다(商?亡秦)」(26권)에서 강대국 진나라가 어떻게 망했는지를 진단한다. 이 글을 읽어보자.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필경에는 사리(私利)의 제목(題目)이 될 뿐이다.
가난한 것보다 부유한 것, 허약한 군대보다 강력한 군대의 존재는 상식적으로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국가가 가난하고 허약했기에 외침에 시달리고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호가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뒤의 문장에 있다. 부국강병은 필연적으로 ‘사리’ 곧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 사적 이익, 곧 개인적 이익의 도구가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풀어 말하자면, 국가 권력을 움켜쥔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이익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성호에게 중요한 것은 국부의 증가와 군사력의 강화 자체가 아니라, 그 부와 군사력의 속성이다. 성호는 이렇게 말한다. “국부와 강한 군대를 말할 때 인의(仁義)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인의를 들어 말하면 국부와 강한 군대가 그 속에 절로 있게 되는 것이다.” 보통 부국강병만을 주장할 때 ‘인의’라는 윤리적 속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부를 낳고 쌓지만, 그 과정에 윤리가 들어갈 공간은 없다. 첨단무기를 사들이고, 핵무기를 만들 때 인간의 생명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거꾸로 ‘인의’의 추구를 목적으로 삼을 경우, 인의의 실현을 위한 일정한 부와 강함이 자연스럽게 수반된다. 성호는 국부와 강한 군대는 윤리적 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강대국은 필연적으로 멸망한다. 그 증거가 상앙이다.
상앙은 부국강병에 뜻을 두었고, 끝내는 그것을 이루었으니, 진나라에 공이 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진나라를 망친 자는 상앙이다. 그가 인의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기주(岐周, 주나라의 최초 건국지)의 옛터를 어루만지고 다시 문왕(文王)의 정치를 펼쳤다면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상앙은 진나라 효공에게 법을 완전히 바꾸자는 아이디어, 곧 ‘변법(變法)’을 제안한다. 과거의 관습에 기초한 낡고 물렁한 법은 내다버리고 강력한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실행하자는 것이었다. 일부의 저항이 있었지만, 효공은 상앙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먼저 백성을 열 집, 다섯 집 단위로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하고 연좌제를 실시하여 백성들 심하게 통제한다.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게으른 자는 모두 관청의 노비로 삼고, 곡식과 피륙을 많이 생산하는 농부는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개인적인 싸움을 벌이는 자는 처벌하고, 군공(軍功)에 따라 사회적 대우를 다르게 했다. 군공이 있는 사람은 영예를 누리지만, 군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부유해도 영예를 누릴 수가 없었다.
상앙의 변법은 보다 강력한 국가 권력의 집행을 의미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전 사회의 군사화를 지향했다. 상앙의 구상대로 군사력을 강화한 진나라는 과연 초?연?한?조?위?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다. 진나라는 부와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이 된 것이다. 한데, 성호가 상앙이 진나라를 망친 사람이라 지적하는 것은 왜인가?
성호는 상앙이 했던 일 중 가장 인상 깊은 일로 정전제(井田制)의 폐지를 든다.
맹자는 상앙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 당시 제(齊)나라 등(?)나라 사이에 이에는 정전제가 흔적도 남지 않았는데, 오직 상앙만이 천맥(阡陌)을 열어 없앴다 하니, 당시 진나라에는 여전히 성인의 유제(遺制)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것, 곧 천맥을 열어 정전제를 없앤 것이 그의 정책이 인의와 배치된 하나의 증거라 하겠다.
성호의 지적처럼 상앙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맹자에 의하면, 정전제는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다. 경작지를 우물 ‘井’자의 형태로 나누면, 모두 아홉 구역이 된다. 이 아홉 구역 중 여덟 가족이 1백 무(畝)씩 차지하여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1백 무는 여덟 가족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세금으로 낸다. 성호에 의하면 상앙과 맹자가 살던 시대에는 오직 진나라에만 정전의 유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정전에서 남북으로 난 길을 ‘천’, 동서로 난 길을 ‘맥’이라 부르는바, 천맥을 열었다는 것은 정전제를 없애버렸다는 뜻이다. 천맥을 없앤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려는 경지 정리다.
성호가 정전제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인의의 정치를 표방한 주나라의 유제였기 때문이다. 상앙이 정전을 무너뜨린 것은 곧 과거 주나라의 유제로부터의 결별이며, 인의와의 결별이다. 인의라는 말은 지금 세상에 쓰이기 어려운 낡은 말이다. 나 역시 인의란 말을 꺼내고 싶지 않다. 인의라는 말에서 유가의 ‘위선’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입만 벌리면 인의를 들먹이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얼마나 반인의적(反仁義的) 행태를 벌였던 것인지! 하지만 성호가 말하는 인의는 곧 인간에 대한 윤리적 배려를 의미한다.
성호는 상앙의 윤리성을 배제한 정책이 결과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했지만, 그것이 곧 패망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상앙의 부국강병책의 결과를 보자.
마침내 패업(覇業)이 이루어지자, 국부는 도를 넘어서 사치가 되고, 군대의 강함은 도를 넘어서 교만이 되었다. 사치는 반드시 무거운 세금을 긁어 들이게 되고, 교만은 반드시 사람을 학대하게 된다. 그러다 시황제에 이르러 더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으니, 그것은 모두 상앙이 남긴 해독의 결과였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나라는 마침내 패업을 이루지만, 그들이 이룩한 국부는 사치로 치닫는다. 강력한 군대가 있으니 교만해지기 마련이다. 진나라의 사치는 무엇이었던가. 진시황은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지하무덤을 만들고, 만리장성을 쌓는다. 이 짓을 하자면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한다. 백성을 비틀고 쥐어짠다. 강력한 군대, 곧 폭력을 가지고 있으니, 어떤 인간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다. 폭력 앞에 무력한 인간은 거대한 토목공사에 오직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구로 동원될 뿐이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노동에 시달리고 죽었던가. 결과야 빤하다. 인간에 대한 배려, 윤리성이 결여된 강대국 진나라가 결국 천하로부터 외면받아 통일 이후 불과 16년만에 망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일 터이다.
성호의 부국강병이 필경 사리(私利)의 제목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통한다. 윤리성을 결여한 부국강병론은 국가 자체를 위한 것이고, 동시에 국가 권력을 장악한 세력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인간 대다수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지구상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보라. 그 강력한 국가 파워를 미국의 어떤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지, 또 그 국가 파워가 세계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하지만 그 강대국에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부국강병론은 현재도 한국인을 세뇌하고 있는 중이다. 눈만 뜨면 들리고 보이나니, 무엇이 세계 몇 위란 소리와 이미지다. 그것은 부국강병론의 변주다. 하지만 그 부국강병론이 국민 개개인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는 성찰이 드물다. 윤리성 없는 부국강병론은 결국 나라를 망치고 인간을 망치는 길임에도 우리는 부국강병론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