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밥상
얼마 전 중국을 다녀왔다. 소수민족들이 사는 곳을 다녔더니, 그 쪽 사람들이 즐기는 향신료를 강하게 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큰 도시로 나와 중국식 토렴[火鍋, 화과]으로 제법 유명하다는 식당에 들렀지만, 역시 강한 향 때문에 거의 먹지 못하고 수저로 방아만 찧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기름 범벅이 된 물과 남은 음식은 다 어디로 가는거지?” 필시 그것들은 그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양자강을 오염시킬 것이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사정이 떠올랐다. 중국은 대도시의 몇몇 식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겠지만, 한국에서 음식물의 폐기는 거의 일상화된 일이다. 이게 옳은 일인가. 성호의 말을 들어보자.
성호는 「씀바귀를 엿처럼 달게 먹다(菫?如飴)」(25권)는 글에서 『시경』 대아 「면(綿)」의 “주나라 들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니, 씀바귀나물이 엿과 같이 달도다.”(周原??, 菫?如飴)란 구절을 인용한 뒤 쓰디쓴 씀바귀나물이 엿처럼 달게 여겨졌던 이면의 사정을 풀어 놓는다. 여기서 그 사정에 대한 말은 줄이자. 중국 고대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성호의 음식에 대한 기호다.
나는 가난한 생활도 아무 탈 없이 지낸다. 고기반찬이 상에 오르는 일은 드물지만 또한 즐거워하고 싫어하지 않는다. 채소밭 한 이랑을 가꾸어 손수 호박을 심고 누렇게 익기를 기다려 따다가 갈무리해 둔다. 겨울이 되면 삶아 국을 끓이고는 밥을 말아 먹는데, 그 맛이 너무나 좋아서 쇠고깃국이나 양고기국보다 훨씬 낫다.
콩도 누런빛을 띤 붉고 겉이 말랑한 것이 있는데, 쌀에 5분의 1 정도를 섞어 밥을 하면, 맛이 달다. 쌀밥과 같이 씹어보면 다른 반찬 없이도 밥 한 사발을 다 먹게 된다. 이것으로 호박이나 콩도 엿처럼 달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밥상에 고기반찬이 오르는 일이 드물어도 식사가 즐겁다고 한다. 겨울에 자신이 심어 거둔 호박을 넣어 끓인 국이 고깃국보다 훨씬 맛이 있고, 콩을 넣어 지은 밥은 별 반찬이 없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이 있기 때문이다.
성호의 소박한 밥상은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실감할 수 없는 이야기다. 찬거리를 구입하기 위해 아내와 대형할인점의 식품매장에 가보면 먹을거리의 다양함과 풍부함에 되레 기가 질릴 지경이다. 어릴 적부터 먹어 왔던 식재료는 상대적으로 적고, 태반이 수천 킬로미터 바다를 건너온 것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반이 아니라 대부분이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쌀을 제외하면 5%에 불과하니 말이다. 이렇게 온갖 먹을거리를 수입해서 먹어치워도 아무 탈이 없을까?
대형할인점의 식품부에 들를 때마다 나는 끔찍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채소와 과일 외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대부분의 식품은 살아있는 동물의 육신이거나 아니면 대부분 그들의 시신이다. 그것들은 오직 인간의 미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잡혀온 것이다. 시신들은 토막이 나고, 으깨지고, 피를 흘리고, 미이라가 되어 먹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 어떤 것들은 좁은 수조 속에 갇혀 포개진 상태로 죽지 못하고 강제로 ‘살려져’ 있다. 그들은 아마도 산 채로 살점을 뜯길 것이고, 시신의 잔여물은 오염물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죽음의 잔치가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가 가동시키는 식품산업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가장 오래된 생산 활동인 농업의 성격 역시 판연히 달라졌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먹을 것을 생산했던 농업은 시장에서의 판매할 상품으로서 식품을 생산하는 산업이 된 지 오래다. 그것은 석유와 전기가 없으면 존립이 불가능한 산업인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적 농업과 수산업, 식품업은 인간이 먹고 소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수천 킬로미터의 바다를, 하늘을, 육지를 건너서 옮긴다. 그리고 음식산업은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보다 많이 먹고 버릴 것을 권장(아니 강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낭비는 결국 하늘과 땅, 강과 바다를 더럽히고 급기야 바닥을 내고 말 것이다. 게다가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음식물이 온전할 리 없다. 화학물질로 범벅이 될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아토피는 항용 듣는 명사가 되었고, 암은 감기처럼 흔하다. 이 비극이 자본주의가 만든 음식 산업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데, 건너편에서는 비만 탈출과 ‘에스라인’과 ‘몸짱’을 위한 병원과 피트니스 센터가 성업 중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희극인 것이다.
이런 느낌은 나만의 유별난 것이리라. 물론 나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오로지 자신의 미각의 충족을 위해 온갖 생명을 죽여 필요 이상 먹어치우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는커녕 TV와 신문 등의 매스컴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미식을 찾아 먹으라고 떠들어댄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성호의 말을 들어보자. 성호는 미식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나는 밤에 앉아 있어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언젠가 손이 찾아와 진미를 늘 갖추고 먹어야 한다며 맛있는 반찬을 주기에 그의 말을 따라 먹어보았다. 그 반찬을 다 먹자 이내 배가 고팠고, 계속 다른 좋은 반찬을 구해서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저녁에 밥을 배불리 먹었는데도 아침이면 반드시 갑절이나 배가 고팠다. 이 때문에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다가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써서 자손들에게 경계한다(「검소한 데로 들어가기는 어렵다(入儉難)」, 10권).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성호는 미식을 향한 욕망의 속성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식은 또 다른 미식을 찾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 무한히 확장되는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이 가야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그리고 당신도 얼마든지 그 길로 갈 수 있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결코 쉽사리 충족되지 않는다. 극소수의 인간만이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지만, 그조차 결과는 만족이 아닌 권태로움이 된다.
성호는 욕망을 자극하지 말라고, 또 다른 사람의 욕망을 자기 욕망으로 삼지 말라고 충고한다. “무릇 빈천한 사람은 많고 부귀한 사람은 적으니, 부귀한 사람의 경우를 기준으로 삼을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나물과 맹물을, 맛있는 음식과 진귀한 음료만 못한 것이라고 해 버린다면, 도리어 자신을 해치는 것이 아니랴?”(「굶주림과 목마름, 사치와 교만(飢渴奢泰)」, 23권) 성호는 부귀한 사람의 욕망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한다. 단순히 거친 것을 먹고 만족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에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성호가 말하는 부귀한 자들은, 요즘으로 치면 부귀한 사람은, 자본을 소유하거나 자본을 운영할 수 있는 권력을 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소유, 소비가 바람직한 생의 목적이라고 끊임없이 설파한다.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따라야만 그들의 부는 정당화되고 영원히 보장된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을 모든 인간이 충족시킬 수는 없다. 욕망의 충족은 손을 뻗치면 닿을 것 같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 닿을 수 없는 곳에 손을 뻗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
성호의 소박한 밥상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성호 자신은 가난한 생활에도 잘 지낼 수 있어 늘 나물만 먹고도 그것이 괴로운 일인 줄을 모른다고 한다. 고기를 먹어보아도 나물보다 그리 나은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굶주림과 목마름, 사치와 교만」). 성호가 하는 말의 요지는 이렇다. 감각은 길들이기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따라서 먹는 것 역시 길들이기 나름이라고. 곧 욕망을 다시 길들여 소박한 밥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건강한 삶과 환경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어느 누가 성호의 범상한 말에 귀를 기울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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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문학을 현대의 텍스트로 생생히 살려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요즘 필자는 조선 시대에 지식이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고 유통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머릿속에 어떻게 설치되어 인간의 사유와 행위를 결정했는지, 그 결과 어떤 인간형이 탄생했는지에 대해 공부 중이다. 최근작 『열녀의 탄생』과 연계하여, 조선 시대 남성-양반이 그들의 에토스를 만들기 위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의식화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성다움과 양반다움으로 남성-양반은 어떻게 여성, 백성들과 구별 짓고 우월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면면을 연구할 계획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안쪽과 바깥쪽』,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열녀의 탄생』, 『시비是非를 던지다』, 『사라진 서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