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다시 읽기’를 시작하며
한국 사람이면 『성호사설』이란 책 이름은 다 안다. 한국 교육을 말할 때 비판, 때로는 저주의 대상이 되는 ‘주입식 교육’으로 실학자란 말을 들으면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그리고 성호 이익을 떠올리고, 이어 『목민심서』와 『열하일기』와 『성호사설』을 자동적으로 거기에 덧붙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거나 저주하고 싶지는 않다. 저자와 책이름을 아는 것만 해도 어딘가. 저자와 책이름을 안다는 것이 독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관계, 특히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고전적인 이유로 인해 정작 이런 책들을 읽어본 일이 드물 것이다. 원래가 그렇다. 이른바 고전이라는 책은 읽히지 않는 책을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이니 말이다.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책의 중요한 골자만 알면 그만인 것이다. ‘『성호사설』 다시 읽기’ 역시 그 골자를 파악하자고 해서 쓰는 글이다. 물론 골자란 나의 관심과 방식으로 읽어낸 골자란 말이다.
『성호사설』이란 책이 탄생한 내력과 이익(李瀷, 1681-1763)에 대해서는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에서 이미 말한 바 있기에 여기서 중언부언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성호사설』에 대한 이익의 말만 약간 인용하고자 한다.
『성호사설』이란 성호옹(星湖翁)의 희필이다. 성호옹이 이 책을 쓴 것은 어떤 의도에서였는가. 아무 의도가 없다. 의도, 곧 뜻이 없는데 어찌 이런 저작이 나오게 되었는가? 옹이 그냥 한가할 적에 책을 읽던 여가에 어떤 것은 전기(傳記)에서, 어떤 것은 자집(子集)에서, 어떤 것은 시가(詩歌)에서, 어떤 것은 전문(傳聞)에서, 어떤 것은 우스갯소리에서 얻기도 하였는데, 웃고 기뻐할 만하여 남겨두어야 할 것들을 손가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큰 더미를 이루었다.
장난삼아 쓴 글이라니, 겸손한 말씀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자못 심각하다. 그는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메모로 남긴다. 진지한 지식인의 독서와 사색이 쌓인 메모는 세월이 흐르자 거대한 사유의 산맥을 이룬다. 어느 날 정리해 챙겨보니, 3천 꼭지의 글이 되었다. 이것이 『성호사설』이다.
『성호사설』이란 책은 읽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한문으로 쓰인데다가 모두 3007편이란 거창한 분량 때문이다. 3007편은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 등 다섯 부문으로 나뉜다. 글이 다루고 있는 제재와 주제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분류만 이루어졌을 뿐이지 각 편은 일정한 체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성호사설』의 언어 전체가 특정한 주제를 향해서 정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이런 비체계성을 흠으로 잡았지만, 나는 이것을 도리어 장처로 보고 싶다. 한편의 정제된 저작은 수많은 부분을 배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성호사설』은 이런 점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해서, 이 책은 오만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론 내가 『성호사설』의 모든 글을 다 다룬다는 것은 아니다. 경사문은 유교 경전과 중국 고대·중세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곧 경학과 역사학의 기본적인 텍스트를 읽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이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누가 사서삼경을 원문으로 공부하며, 『자치통감』을 왼단 말인가. 시문문의 경우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한시와 한문산문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즘 세상에서 읽을 만한 것은 천지문·만물문·인사문 중 약 7백 항목이다(물론 나의 기준으로 선별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당쟁, 권력투쟁, 벌열), 경제(화폐, 토지, 마정), 관청, 외교(일본·중국·여진과의 관계, 영토문제 등), 지식인, 학문(각종 학문들), 교육, 과거, 서양소식, 지리, 지도, 전쟁, 무기(총포·화약), 행정, 종교, 이단(무속·서학), 풍수지리, 형벌, 도둑, 유민, 서얼, 노비문제, 여성, 섹스, 옷, 음식, 주거 등 그야말로 조선사회의 모든 국면을 망라한다. 이것들이 나의 글감이다.
이 글은 『성호사설』을 읽고 쓰는 잡문이다. 『성호사설』을 글감으로 삼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 서양에 대해 공부한 분들은 아무래도 서양 쪽 사정을 들어 글을 쓸 터이고, 중국에 대해 공부한 분들은 중국 쪽 사정을 들어 글을 쓸 터이다. 나는 신통치 않지만 공부라고 조금 한 것이 조선시대 한문학이다. 그래서 비교적 익숙한 조선시대의 이런저런 사정을 꼬투리 삼아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이니 뭐니 하면서 추켜세우고 꼭 읽어야만 한다고 우길 생각도 전혀 없다.
『성호사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글이니, 지금 세상과 기본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곳도 허다하다. 또 우리 사회가 『성호사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완벽하게 극복한 것 같지도 않다. 아니 도리어 그 반대다. 오래된 낡은 글이라 타박하지 말고 그 속에서 건져내어야 할 지혜가 있다면, 건져내어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럴 수가 없다면 굳이 고전이니 뭐니 들먹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호에게 씌워진 실학자란 명사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다. 성호는 실학자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실학자라고 하는 고정된 판단은, 성호에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을 제한해 버린다. 나는 실학자 성호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성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다. 그는 가부장제에 의식화된 사람이며, 양반이 다스리는 세상 이외의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유학자로서 조선후기의 사회모순을 직시했던 사람이고, 양반이 다스리는 세상이, 양반이 원래 의지했던 유학(성리학)이란 원칙에 충실히 이루어질 것을 바랐을 뿐이다. 실학자란 명사를 떼고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아마도 성호를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체제를 다잡아 쓰는 글이 아니니 허술한 구석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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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문학을 현대의 텍스트로 생생히 살려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요즘 필자는 조선 시대에 지식이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고 유통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머릿속에 어떻게 설치되어 인간의 사유와 행위를 결정했는지, 그 결과 어떤 인간형이 탄생했는지에 대해 공부 중이다. 최근작 『열녀의 탄생』과 연계하여, 조선 시대 남성-양반이 그들의 에토스를 만들기 위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의식화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성다움과 양반다움으로 남성-양반은 어떻게 여성, 백성들과 구별 짓고 우월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면면을 연구할 계획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안쪽과 바깥쪽』,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열녀의 탄생』, 『시비是非를 던지다』, 『사라진 서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