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1년 8월 20일, 나는 지금 이 ‘후기’를 잘츠부르크의 단골 숙소에서 쓰고 있다. 다시 이곳에 온 것이다.
“이제 슬슬 우리도 음악제 졸업인가.” “비용도 들고 말이죠.” “게다가 체력도 시간 변통에도 자신이 없어졌어.” “때로 실망스런 연주회도 있어요.” “끊임없이 보수화도 진행되고 있어.” “그래요. 올해로 마감할지도. 유감스럽지만.” “응, 이제 곧 졸업이네.” …
매년 8월 말이 되면 언제나 나와 F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막상 다음 해 8월이 되면 역시 이곳에 와 있게 된다. 그게 올해로 12년째다.
음악제 참관을 끝내고 일본의 집으로 돌아오면, 약 3개월 뒤인 11월에 다음 해 프로그램이 송부돼 온다. 그것을 F와 살피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티켓을 예약해버리고 만다. 비용과 시간을 변통하는 건 그 뒤의 일이다. 올해는 3월에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로 내가 근무하는 대학 업무 스케줄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예년처럼 여름방학을 즐길 수 있을지 학기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그럭저럭 예정대로 됐다.
이번에 우리가 예약한 것은 오페라 3곡, 오케스트라 5곡, 그리고 실내악과 가곡의 밤을 합해 모두 17곡이다. 이제 슬슬 졸업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꽤나 욕심을 부렸다. ‘2011년에 볼만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는 11월에 신청했는데 티켓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밖에도 우리를 잡아끄는 매력적인 곡들이 많았다.
내가 ‘졸업’을 연기한 최대 이유는 8월 18일, 19일 이틀 밤 연속으로 진행되는 ‘쇼스타코비치-치클루스(연속 연주)Schostakowitsch-Zyklus’ 때문이다. 지금 최고조에 이른 만델링 콰르텟Mandelring Quartett이 쇼스타코비치의 현악4중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평생 두 번 보기 어려운 이런 기회를 뻔히 보고도 놓칠 수야 있나. 게다가 티켓값은 하룻밤에 8유로! 두 밤 합해서 16유로로 싼값이다.
그 연주회가 지난밤에 끝났다. 1938년의 제1번부터 죽기 전해인 1974년의 제15번에 이르기까지 쇼스타코비치에 푹 빠졌다. 만년의 3곡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을 위한 침울하고 한없이 아름다운 장송곡이었다.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한 감각과 벗들 중의 누군가가 죽어버린 듯한 적막감이 남아 있다. 그 인상에 대해 지금 여기에 쓰기 시작하면 이 연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지난해 봄부터 33회에 걸쳐 서양음악을 소재로 생각나는 대로 써 왔다. 일상 업무를 보면서 줄곧 압박해오는 마감에 맞춰 계속 써나가는 게 솔직히 말해서 꽤나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이 연재가 내겐 즐거운 일이었다. 이 즐거움은 필시 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지닌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음악(또는 나쁜 음악일지라도)을 들은 뒤 그것을 누군가에게 어찌 얘기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것은 필시 음악을 통해 마음속의, 보통은 언어로 인식돼 있지 않은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금방 언어화할 수 없는 부분도 많고, 언어로 잘 옮겨지지도 않아 늘 답답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연재에서는 음악을 둘러싼 나와 F의 대화를, 때로 엇갈리는 의견이나 충돌까지 넣어서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고자 했다. 이것도 음악을 듣는 행위의 일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재미있을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으나, 쓰고 있는 내겐 재미있는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33회나 썼다는데 그래도 쓰지 못한 게 많다.
작곡가 얘기를 하자면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1685~1759), 바흐,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1567~1643), 비발디 등 바로크 거장들의 음악을 나는 무척 사랑하는데 붓이 거기까지 가 닿진 못했다.
베토벤, 슈만, 브람스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못했다. 내겐 그들을 본격적으로 얘기할 실력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음악 얘기를 하는데 ‘실력’ 운운하는 사고방식을 F는 반대하겠지만 그것이 내 정직한 기분이다.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등 러시아?소련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못했다.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쓰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정리가 되질 않았다. 특히 러시아 혁명, 소련 역사와 관련지어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흥취는 배증된다.
나는 요즘 현대음악의 매력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올해 잘츠부르크에서도 모턴 펠트만Morton Feldman, 존 케이지John Cage,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1928~2007), 거기에다 이름조차 몰랐던 지아친토 쉬엘지Giacinto Scielsi 등의 현대음악 작품을 감상했다. 하지만 이것들에 대해 뭔가를 쓰려면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
연주자들도 쓰지 못한 사람이 많은데, 한 사람만 들자면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1915~1997)다. 그의 실제 연주를 F는 두 번 들어봤다는데,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레코드나 CD로는 들어봤지만, 내가 그에게 정말 매료당한 건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서였다. 1977년 9월 27일 리히테르는 영국의 알도바라라는 마을에서 작은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 모습을 찍은 영상을 일본 <NHK>도 방영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자막이 붙어 있었다.
“리히테르는 원래 카메라를 몹시 싫어했으나 그의 아내는 영상 수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카메라를 감춰놓고 몰래 수록하자는데 동의했다. 리히테르는 연주 뒤 그 사실을 알았으나 수록해 두려는 아내의 열의를 받아들였다. 이 프로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 그 해에 탄생 200년을 맞은 슈베르트에게 바치기 위해 재편집됐다.”
곡목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G장조 D894다.
대머리에 안경을 약간 헐겁게 낀, 언짢은 듯한 표정의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에 손가락을 살짝 내려놓자 첫 화음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의 경이로움!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온 듯했다. 이것이 현실의 인간이 연주하는 소리란 말인가?
이번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도 볼로도스Arcadi Volodos가 같은 곡을 연주했다. F는 “검은 고양이가 사뿐 나타난 것 같아. 비로드와 같은 광택…”이라 비유했다. 거기에 비하면 리히테르는 끌로 나무를 깎는 듯한 음이다. 볼로도스는 분명 뛰어났다. 틀림없이 리히테르보다 능수능란할 것이다. 하지만 능수능란만으로는 다 되는 게 아닌 것이 음악의 무서운 매력이다.
리히테르는 1915년, 즉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인을 아버지로,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20세기를 통해 격심한 적대관계에 있던 독일과 러시아로 한 몸이 나누어진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1941년 소련 당국에 의해 총살당했고, 어머니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로 이주했다. 리히테르 자신은 소련 당국으로부터 늘 감시당했다. 전쟁 뒤 카라얀과 만났을 때 “나는 독일인”이라며 그가 말을 걸자, 나치 당원 출신 카라얀은 (그대가 독일인이라면) “나는 중국인”이라는 천박한 야유로 응답했다고 한다. 소련시절 말기에는 몇 번이나 서방으로 이주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평생 소련을 떠나지 않았으며, 소련 붕괴 뒤인 1997년에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20세기 인류사 그 자체처럼 복잡했고 고난에 찬 것이었다. 그 고난이 저 기적과 같은 화음을 가능하게 한 걸까? 이번 연재 중에 리히테르를 자세히 언급할 수 없었던 게 아쉽다.
아, 정말, 이런 얘길 하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끝이 없을 것 같다. 이제 입을 닫고 붓을 내려놓지 않으면…
나의 음악순례기를 한국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한국은 세계적으로 볼 때 클래식 음악이 번성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연주자를 많이 배출했다. 유럽에서 오페라를 볼 때 출연자 중에 한국인 가수가 포함돼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감상자층이 두텁다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연주회에서 한국인인 듯한 사람을 발견한 적은 거의 없었다. 거리에선 한국인 관광객을 흔히 찾아볼 수 있었으니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어에 “문턱이 높다”와 같은 표현이 있는데, 어쩐지 문화적 장벽 같은 걸 느껴 멀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이 일부 엘리트층의 즐거움, 중장년층 향수의 대상, 성공 스토리만 꿈꾸는 사람들의 지위 상승 수단 등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면 유감스런 일이다. 한국인들도 좀 더 자신의 감성을 개방해서 더욱 자유롭게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올해 잘츠부르크에서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KBS> FM 방송 ‘가정음악’ 진행자 장일범 씨를 축제 대극장 앞에서 발견했다. 몇 년 전 내가 서울에 체류할 때 연주회장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 말을 걸었더니 허물없이 대해 주었다. 동료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왔다고 했다. 며칠 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이오란타 Iolanta>(연주회 형식) 연주회장에서 가장 앞줄 중앙의 안나 네트레프코의 스커트 자락이 얼굴을 스치듯 가까운 좌석에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는 그를 봤다.
또 한 사람, 쇼스타코비치 치클루스 회장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온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놀랍게도 그녀는 내 독자였고, 이 연재도 읽고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 체류 중에 잘츠부르크에 가면 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왔더니 정말 만나게 됐다며 웃었다. 아직 6살이라는 그녀의 딸이 오후 4시부터 밤 11시 가깝도록 계속된 쇼스타코비치 연주회를 얌전하게 듣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 이 아이가 성장하면 저 연주회 밤의 추억을 어떻게 떠올릴까? 어디에 갔고 누구를 만났는지는 모두 잊어버린다 해도 저 침울하고 아름다운 음향은 그녀의 혈액 속에 녹아들어 계속 남아 있지 않을까?
내가 이 연재에서 써온 것은 음악비평이 아니다. 한 사람의 아마추어인 내가 음악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다. 내가 예전에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썼던 것도 미술비평이 아니었다. 미술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 자신에 관해 쓴 것이다. 거기에 비친 것은 30대의 나, 1980년대의 나였다. 이번에 음악이라는 거울에 비친 것은 50대의 나, 2000년대의 나다. 예전의 미술 순례는 단 한 사람의 여행이었다. 이번의 음악 순례에는 F라는 동행자가 있다. F에게 이끌려 가지 않았다면 나는 음악 순례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이 글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걸 통해 나라는 인간이 성장을 했는지 어떤지 나 자신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만큼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돈 죠반니!)에서 슈베르트, 바그너를 거쳐 말러에 이르는 음악의 세계는 바로 ‘죽음’으로 에워싸여 있다. 특히 19세기 음악은 그렇다. 음악이라는 예술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더 ‘죽음’과 결부돼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리듬은 심장 박동의 반영이다. 음악의 종말이 천둥소리 같은 큰 음향이든 정밀한 페이드아웃이든 그것과 무관하게 심장 박동은 끊임없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도 리히테르도 ‘죽음’을 향한 순례 여행을 마치고 저런 작품과 연주를 우리에게 남겼다. 나의 음악 순례가 ‘죽음’을 향한 여행이라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가 선 방의 창으로 카푸치나베르크의 가파른 언덕이 보인다. 그 중턱에 일찍이 슈테판 츠바이크가 살았고, 유럽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저택이 있다. 오늘의 연주회(마리스 얀손스 지휘, 빈 필, 피아노 독주 랑랑)는 마티네(matinée, 낮공연)였기에 나는 해질녘에도 방을 나가지 않고 창을 통해 물끄러미 그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언덕을 비추는 햇빛이 오랫동안 천천히 엷어지면서 어느샌가 빛이 어둠으로 바뀌어 간다. 황혼이 금빛 장막을 내리고 있다. 지금은 오후 8시 반.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곧 가을이 올 것이다.
음악제를 보러 온 숙박객들은 하나 둘 떠나갈 것이다. 얼굴을 익힌 이들은 “또 내년에…”하고 인사를 나눈다.
또 내년?… 내년에도 나는 여기에 올까?
나의 음악 순례, ‘죽음’을 향한 여행은 내년에도 계속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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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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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