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그렇군. 나는 ①경의를 표해 플라시도 도밍고, ②브린 터펠Bryn Terfel(1965~ ), ③은 토머스 햄슨으로 해두지. 햄슨은 꽤나 많은 역을 맡아 노래하는 걸 들었어. 아주 지성적인 인물인데, 제일 내 마음에 드는 건 <메리 위도>의 섹시남이야.”
F “그럼, 이번엔 여성 성악가로 가볼까요. 크리스티네 셰퍼Christine Schäfer(1965~ )는 독일가곡을 부를 때 특유의 섬뜩함이 있는데, 2008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잉고 메츠마허Ingo Metzmacher(1957~ )의 반주로 부른 리사이틀에선 좋았어요. 하지만 2009년 헨델의 오페라 <테오도라 Theodora>에서는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했죠. 바로크엔 서툴렀던 것 같아요. 그에 비해 그 오페라에 나온 베르나르다 핀크Bernarda Fink는 정말 좋았죠. 기술이 뛰어나고 품위도 있어 감격했어요.”
S “체칠리아 바르톨리Cecilia Bartoli(1966~ )가 2005년에 잘츠부르크 대극장에서 펼친 리사이틀도 좋았지요. 피아노 반주는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1953~ )였어.”
F “예, 그만큼 많은 관객을 즐겁게 해주고,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건 역시 대단해요. 소리는 크진 않지만 로시니를 부르는 기교는 초일류급이고, 무엇보다 차밍해요. 연주회장의 남성들만이 아니라 악보를 넘기는 아저씨까지 넋을 잃었죠. 그런데 당신, 왜 그 사람 얘기는 하지 않는 거죠?”
S “르네 플레밍Renée Fleming(1959~ )? …소중하게 남겨 둔 거요.”
F “저 중저음역 소리의 매력! 게다가 그녀는 언어의 천재죠.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거기에다 러시아어, 체코어까지. 어느 말이든 하나하나 명료하고 아름다워.”
S “연기력도 발군이지. 서울에 체류 중이던 2007년, MET 라이브 뷰잉으로 본 차이콥스키Pyotr Ilyichi Tchaikovsky(1840~1893) <오네긴 Eugene Onegin>의 타치아나 역이 출중했어.”
F “거기선, 라몬 바르가스Ramon Vargas(1960~ )가 부르는 렌스키의 아리아가 정말 애절했죠.”
S “르네 플레밍이 부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 종막終幕의 원수 부인의 아리아는 더욱 애절하지. 마치 싹둑 잘려 마르기 직전의 꽃송이 같아. 이 오페라는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1930~ ) 지휘,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 연주로 1979년에 녹음한 게 역사적인 명반이라고들 하는데, 원수 부인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수많은 명가수들 중에서도 르네가 최고라고 나는 생각해요. 같은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 Capriccio>도 올해 MET 라이브 뷰잉으로 봤는데, 시인과 음악가 두 사람한테서 동시에 구애를 받는 여성의 자기도취를 저토록 자신만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일 거야. 그녀가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게 앞으로 몇 년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쩐지 심란해져.”
F “그래요. 돌이켜 보면 수많은 가수들이 어느 사이엔가 순식간에 퇴장해버렸어요.”
S “해서 나의 여성 성악가 베스트 3은 ①르네 플레밍, ②카리타 마틸라Karita Mattila(1960~ ). 소리가 아름다운 건 르네 이상일지 모르겠어. ③은 망설여지지만 지금 최고조의 디아나 담라우Diana Damrau(1971~ )로 하겠어요. 그럼 당신이 꼽은 여성 성악가 베스트 3을 얘기해줘.”
F “좋아요. ①알린 오저Arleen Auger(1939~1993). 대단히 지성적이고 청아해. 다음으로 ②테레사 베르간사. 그리고 체칠리아 가스디아Cecilia Gasdia도 넣고 싶지만 어차피 3명으로 압축해야 한다면 ③베르나르다 핀크로 해둘까요. 모두 예외없이 특별한 재능을 지녔어요. 신이 미소를 보낸 사람들이죠.”
S “그러면 최후의 최후로 관현악곡 베스트 3. 우선 나부터.”
F “부탁해요.”
S “③은 본문에서 언급한 클라우디오 압바도 지휘, 루체른 축제 관현악단 연주의 말러 교향곡 제7번. ②는 2009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1943~ ) 지휘로 콘세르트헤보Concertgebouw 관현악단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0번. 이 곡은 카라얀이 지휘하고 베를린 필이 연주한 게 유명하지만 완전히 인상이 달라요. 카라얀 것은 가볍지만 얀손스 쪽은 소련의 역사 그 자체처럼 암울하고 음영이 깊어요. 마지막으로 ①은 2002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게르기에프 지휘로 마이린스키 가극장 관현악단이 연주한 프로코피에프Sergej Prokofjew 교양곡 제5번. 2000년에 마찬가지로 게르기에프 지휘로 빈 필이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도 뛰어나지만, 그걸로 결정했습니다.”
F “내가 뽑은 ③은 현대음악. 2010년 잘츠부르크 음악제, 캉브를랭Sylvain Cambreling(1948~ )이 지휘하고 클랑포룸 빈Klangforum Wien이 연주한 모톤 펠트만Morton Feldman(1926~1987)의 <새뮤얼 베케트를 위하여 For Samuel Beckett (1987)>. 단조로운 리듬이 미세하게 변용하면서 끝없이 이어지죠. 마치 향수를 바른 것처럼 연주가 끝나고 한참 지난 뒤에까지 음악이 몸에 스며 있었어요. ②는 2010년 잘츠부르크 음악제, 사이먼 래틀 지휘로 베를린 필이 바그너, 쇤베르크, 베베른Anton von Webern(1883~1945), 베르크Alban Berg(1885~1935)의 곡을 하나의 작품처럼 연속으로 연주한 프로그램. 말러에 대한 오마주. 정말 아름다웠죠. 래틀의 지성을 느꼈어요.”
S “자 그럼, 드디어 당신의 베스트 원이 남았는데?”
F “나의 베스트 원은, 오래전에 베를린에서 들었던 압바도 지휘, 베를린 필 연주의 브람스 교향곡 제1번과 피아노 협주곡 제2번. 피아노 독주는 라두 루푸Radu Lupu(1945~ )였죠. 압바도는 2000년에 암에 걸려 베를린 필 음악감독직에서 물러났으니까 그건 그 전해였던 것 같아. 시즌 개막 연주회였으니까 틀림없이 9월이네요. 더없이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S “끝난 뒤, 이제 죽어도 좋다고 말했지.”
F “아뇨. ‘지금 죽고 싶어’라고 했죠. 그 더없는 행복에 잠긴 채 죽고 싶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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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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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