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이미 여러 가수들의 이름이 나왔는데, 이번엔 성악가들 얘기로 옮겨 가 볼까나.”
F “플라시도 도밍고는 역시 대단해. <나비 부인 Madam Butterfly>의 텍스트는 너무 평범한데, 1974년 제작 영화판에서 도밍고가 핀커턴 역으로 노래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말할 수 없는 색기色?가 흘러 꼼짝없이 빨려 들어가버려요.”
S “그 도밍고가 음역音域을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바꿔, 지금까지도 노래를 계속하고 있지.”
F “맞아! 지난 시즌 도밍고가 노래한 베르디Giuseppe Verdi(1813~1901)의 <시몬 보카네그라 Simon Boccanegra>를 MET 라이브 뷰잉으로 봤어요. 세월이 흘렀지만, 역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어요.”
S “3대 테너라고들 하는데, 카레라스와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1935~2007)는 어때?”
F “카레라스는 진지하고 성실해. 파바로티는 악보를 읽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타고난 천재죠. 그 소리는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죠. 게다가 만년에는 비애감까지 스며 나왔어요.”
S “그래요. 파바로티가 부르는 <투란도트 Turandot>의 아리아 <아무도 잠자선 안 돼 Nessun dorma>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소박한 민요풍의 <제비는 옛 보금자리로> 등도 나는 좋아해요. 애인한테서 퇴짜맞은 못난 남자의 슬픔이 절절하게 가슴을 치지.”
F “3인 3색. 각기 훌륭하지만 나는 여기에 알프레도 크라우스Alfredo Kraus(1927~1999)도 보태고 싶어요. 좀 딱딱한 소리지만 아주 고품격이죠. 그리고 또 한 사람 잊어선 안 될 사람이 프리츠 분더리히Fritz Wunderlich(1930~1966). 매끈하고 달콤하고 투명한, 기적과 같은 소리. 한국 사람들은 그가 마음에 드는 듯, FM라디오에서 항상 그의 노래가 흘러나와요.”
S “파바로티가 ‘역사상 가장 걸출한 테너는?’라는 질문을 받고는 분더리히라고 대답했다고 하지요. 혜택받지 못한 환경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스타가 됐는데, 1966년 절정기 때 급사했어.”
F “러시안룰렛을 하다가 실수로 자신의 머리를 쏴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나도 한때 그걸 믿었어요. 그는 그런 수수께끼로 가득 찬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죠. 약간 퇴폐적이랄까 건달끼가 있달까…”
S “실제로는 친구의 별장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었다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객석 수 4000 이상의 대극장에서 자신의 노래가 통용될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나중에 디스카우가 말했어. 그것도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F “분더리히와 대조적인 사람이 에른스트 헤플리거Ernst Haefliger(1919~2007). 예전에 그의 공개 레슨을 받은 적이 있는데, 지도가 아주 구체적이고 적확했죠. 엄격해서, 과장된 표현으로 흘러가는 학생에겐 ‘스트리퍼!’ 등의 심술궂은 말도 태연히 내뱉었어요. 주위 사람들한테서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분더리히가 죽은 덕에 배역을 받았다’든가 하는 험담도 들었죠. 소리도 분더리히나 페터 슈라이어Peter Schreier(1935~ )처럼 풍성하고 빼어난 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가 부르는 바흐 수난곡의 복음사가福音史家를 들을 때면 난 울고 말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사무치게 전해져 와요. 그 뒤론, 유감스럽게도 그만한 가수도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S “테너 흉작 시대가 오래 계속되네. 로베르토 알라냐는 어때요?”
F “처음 봤을 땐 애송이 같았는데. 음정이 불안정한 곳도 있었고. 요즘엔 확실히 원숙해졌어요.”
S “그래요. MET의 <카르멘>이나 <돈 카를로>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F “최근에 알게 된 테너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존 마크 에인슬리John Mark Ainsley(1963~ )예요.”
S “아하, 그가 있었지. 우리는 <루푸파>의 악마 역으로 그를 처음 알게 됐지. 좋았어. 해학적이고 서글프고, 하지만 해맑았어.”
F “<루푸파>에서 나는 처음부터 주인공 마티아스 괴르네Matthias Goerne(1967~ )한테 기대를 걸었죠. 확실히 괴르네가 마지막에 부른 아리아는 대단했지만 에인슬리는 그 이상이었어요. 2009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베를린 필이 연주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사계>에도 에인슬리가 독창자로 출연했죠.”
S “맞아. 그때는 표변해서 아주 고지식한 인상이었어. 마치 음악대학 교수 같았지. 틀림없이 그게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해. 그때의 바리톤은 토마스 크바스트호프Thomas Quasthoff(1959~ )였지. 그러면 바리톤 중에서는 누굴 꼽지?”
F “그건 보 스코브후스Bo Skovhus(1962~ )로 정했어요. 몇 년도 더 지난, 아직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시절, 어느 날 차를 운전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슈베팅겐 음악제 실황녹음을 방송하고 있었어요. 아니, 이게 웬일! 놀랐죠. 그가 부르는 독일 가곡이었어요. 서둘러 CD를 샀지요. 그때부터예요.”
S “2009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코시 판 투테 Così fan tutte>에 출연했지.”
F “맞아요. 그가 연기한 돈 알폰소는 몹시 진지했죠. 그전에 <피가로의 결혼>의 알마비바 백작을 노래했을 때도 그 역의 종래 이미지를 깨고 중년 남성의 고뇌를 전면에 부각시켰죠.”
S “아이고, 이 얘기도 끝이 안 보이네. 슬슬 결정을 하자고. 당신이 꼽은 남성 성악가 베스트는?”
F “그럼 이렇게 하죠. ①은 망설일 것 없이 보 스코브후스, 다음 ②는 에인슬리, ③은 헤플리거에겐 미안하지만 분더리히로 하겠어요. 당신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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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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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