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필자) “이 연재 마지막에 나와 F의 베스트 쓰리(3)를 뽑아 봅시다. 우리가 직접 들어 본 연주 베스트 3. 실황연주가 기본이지만, 영화나 녹음도 허용하는 걸로. 그러면 우선 오페라부터. 당신의 베스트 3을 얘기해봐요.”
F “예? 3개로 압축하라니, 무리예요. 안 돼요.”
S “내가 먼저, 1996년 도쿄에서 들었던 쇼스타코비치Dmitri Schostakowitsch(1906~ 1975)의 <무첸스크의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von Mzensk>을 꼽겠어. 당시는 소련이 붕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키로프 오페라가 1993년에 잇따라 두 번이나 일본에 왔어. 지휘자 게르기예프도 아직 잘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줬지. 원전(原典)판 <무첸스크의 맥베스="" 부인="">과 개정판 <카테리나 이즈마이로바="">를 이틀 밤 연속 상연하는 의욕적인 기획이었어. 충격적이었지. 오페라라는 것에 대한 유치한 선입관이 부서졌어.”
F “아, 나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중년 여성의 정념이 지닌 두려움과 슬픔을 남김 없이 묘사했죠.”
S “봉건적 질서가 지배하던 19세기 러시아의 상가商家가 무대인데, 철저히 따돌림당한 아내가 남편과 시아버지를 살해하는 얘기. 주인공은 원작에서는 냉혹한 악녀로 그려졌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또 다른 해석을 가미했어. 불합리한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사투를 벌이는 여성으로 긍정적으로 그렸지. 초연 때는 절찬을 받았지만 몇 년 뒤에는 스탈린한테서 비판당해 상연금지가 됐어. 그로부터 30년 뒤에 상연된 개정판이 <카테리나 이즈마이로바="">야.”
F “나의 베스트 원은 바그너의 <파르지팔 >쯤 될 거야. 2001년 12월, 장소는 런던 코벤트가든 가극장. 사이먼 래틀의 바그너 지휘자로서의 재능도 그때 알아봤어요. 음악의 소용돌이에 통째로 빠져들어 정신없이 끌려갔죠. 나는 바그너의 사상이나 인간성은 싫지만 그때부터 바그너의 갈등이나 모순에 매료당하게 됐어요. 그래도 과연 괜찮을지, 고민이에요.”
S “바그너라면, 최근(2010~2011년)에 MET(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이브 뷰잉으로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 >도 봤잖아.”
F “그것도 좋았어!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James Lawrence Levine(1943~ )은 허리 수술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일단 지휘를 시작하자마자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지. 장대한 작품 구석구석을 숙지해서 악기도 가수도 최선을 다해 노래하게 만들었어. 브린 타펠Bryn Terfel(1965~ )의 보탄, 데보라 보이트Deborah Voigt(1960~ )의 브륀힐데, 요나스 카우프만Jonas Kaufmann(1969~ )의 지그문트… 가수들도 초일류.”
S “보탄의 아내 프리카 역을 한 스테파니 블라이스Stephanie Blythe도 나는 좋아.”
F “당신다워요.”
S “바그너는 어떻게 이토록 중년남성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던 거지? 신神인 보탄도 프리카에게는 도무지 기를 펴지 못했어. 스테파니 블라이스는 관록 있는 가수여서 그 역에 딱 맞아.”
F “그런데, 당신의 베스트 2는?”
S “모차르트의 <가짜 여자="" 정원사="">La finta giardiniera>를 들 수 있을까. 2006년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으로 그의 오페라 전 작품을 연주했지. 그래서 평소 별로 연주되지 않는 이 작품도 볼 수 있었던 거지. 재미있었어.”
F “바르토크Béla Bartók(1881~1945)의 <푸른수염 공작의="" 성="">Herzog Blaubarts Burg>도 정말 좋았어요.”
S “몹시 어두운 러브 스토리야. 당신이 좋아하는 거지.”
F “휠체어의 늙은 퇴역군인으로 설정된 푸른수염 공작과 휠체어를 미는 간호사의 얘기는 정말 무서웠어.”
S “원작의 옛이야기식 공포를 늙음과 성이라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의 공포와 겹쳐 놨어. 청중은 대부분 고령자 커플이어서 죄어오는 듯한 이 무서운 이야기를 그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어.”
F “파리 가르니에좌에서 2009년 말에 본 라모Jean-Philippe Rameau(1683~1764)의 <플라테 > Platée>도 재미있었어요. 개구리 여왕과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엮어가는 희극. 정말 멋지고 유쾌한데, 그럼에도 최후는 개구리가 가여워. 그 개구리는 차별받는 자의 상징이겠죠.”
S “바로크 오페라라면, 요코하마의 가나가와 음악당에서 2006년에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1678~1741)의 <바야제트 >Bajazet>도 봤잖아.”
F “그것도 좋았어요! 메조소프라노인 다니엘라 바르셀로나Daniela Barcellona는 그전인 2002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로시니Gioachino Rossini(1792~1868)의 <호수의 미인="">(연주회 형식)에서 들었는데, 이때가 더 좋았어요.”
S “그런데, 당신은 젊은 시절부터 이탈리아 오페라를 봤잖아요?”
F “대학 4년생일 때 마음먹고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탈리아 오페라 이동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죠. 경마장 마권 판매소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푼돈으로 고급 호텔에 숙박했어요. 상연 곡목은 칠레아Francesco Cilea(1866~1950)의 <아드리아나 리쿠브뢰르="">Adriana Lecouvreur>. 몸집 큰 몬세라토 카발리에Montserrat Caballé(1933~ )한테 아직 30살의 청년이었던 호세 카레라스Josep Carreras(1946~ )가 매달리듯 노래를 했죠. 흡사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울고 있는 것 같아 야릇했지만, 그런 부자연스러움은 금방 잊어버린 채 넋이 나갔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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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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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 >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 >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