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21일 31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신경열神?熱’ 또는 ‘장티푸스’였던 걸로 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병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당시엔 밝히기 곤란한 병은 신경열로 처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기타오의 앞 책)
슈베르트는 단지 음악가로서 불우했고, 또 이성관계가 불운했던 것만은 아니다. 매독이라는, 당시로선 불치이자 불명예였던 병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죽기 6년 전, 25살이었던 슈베르트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기념수첩에 이렇게 썼다. “술, 아가씨, 노래를 사랑하지 않은 건 일생의 패착. -마르틴 루터” 이게 정말 루터의 얘긴지는 의심스럽지만, 당시엔 그렇게들 믿었다.
빈 토박이의 마음에 쏙 드는 게 있었을 것이다. 내성적이고 서툴렀던 슈베르트가 이런 선언을 한 건 드문 일이다. “어쩌면 이 무렵 처음으로 여성 경험 같은 걸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기타오 미치후유는 추측한다. 그 3개월 뒤 자작 오페라 악보를 어느 극장 감독에게 보낼 때 건강이 좋지 않아 외출할 수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매독의 제1기 증상이 감염된 지 3개월 정도 뒤에 나타난다는 걸 감안하면 1822년 말께 성병 감염의 원인이 됐을 법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일생에 단 한 번 경험한 성적 쾌락의 상대는 매춘을 업으로 삼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다시 3개월이 지난 뒤 그는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 후반은 다음과 같다.
보라, 진흙창에 처박히고, 더없는 회한의 산 제물이 되었구나,
내 인생은 고행이 되고, 영원한 파멸에 다가가고 있다.
이 인생을, 이런 나를 죽여, 모든 것을 저승길에 묻어라,
그리고 순수한 힘이 넘치는 것을, 오, 위대한 아버지여, 낳아다오.
당시 매독 희생자들이 적지 않았다. 철학자 니체, 시인 보들레르, 작가 모파상, 음악가로는 슈만과 볼프 등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저서 『지난 시대』에서 19세기의 빈을 ‘사이비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기술했다. 낡은 도덕으로 남녀의 자유로운 결합을 억압하고 있던 지배계급은 한편으로는 억압당한 욕구의 배출구로 공창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매춘이 얼마나 만연하고 있었는지 지금 세대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대의 감상적인 소설에 혹해서는 안 된다고 츠바이크는 경고한다. “그것은 청춘에겐 나쁜 시대였다.”
당시의 청년들은 늘 성병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빈의 거리를 걸어가노라면 6, 7개 건물을 지날 때마다 ‘피부과·성병과 전문의’라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치료는 “불쾌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몇 주 동안이나 매독 감염자의 전신에 수은을 발랐고 그 결과 이빨이 빠지는 등 온갖 건강장애가 일어났다. 게다가 그런 치료를 하고 나서도 환자는 평생 안심할 수 없었다. 언제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해 척추에서부터 사지까지 마비시키고 뇌를 공격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이 진단을 받게 되면 피스톨로 목숨을 끊은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슈베르트도 한때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쓰고 살았던 적이 있다. 1824년에 친구 앞으로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마디 하자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간이란 생각이 드네. 이제 두 번 다시 건강한 몸이 될 수 없는 인간, 그 때문에 뭐든 좋게 생각하지 못하고 나쁘게만 보는 인간, 어떤 희망도 무참히 박살 나버린 인간, 어떤 사랑과 우정도 고통의 씨앗일 뿐인 인간, 아름다움에 끌리는(적어도 그것을 고무시켜주는) 감격도 바람 앞의 등불이 돼버린 남자를 생각해 보게나.”
그러나 슈베르트의 놀라운 점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4년간을 더, 낙오의 밑바닥에서 “깊은 고통의 진흙창을 양분 삼아”(기타오) 쉼 없이 작곡을 계속한 것이다. 최후의 며칠 동안 의식이 혼미했던 슈베르트는 “내 방에 데려다 줘. 이런 땅바닥 구석에 내버려 두지 말고. 이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없는가”라고 형인 페르디난트에게 호소했다. 여기가 네 방이야, 하고 형이 달래자, “아니, 그렇지 않아. 여기엔 베토벤이 없어”라고 중얼거렸다. 이윽고 ‘죽음’이 방황하던 젊은이를 끌어안았다.
<겨울 나그네> 제15곡으로 불리는 <까마귀>는 매독과 죽음의 은유일 것이다. 방황하는 젊은이 뒤를 한 마리의 까마귀가 계속 따라간다. 젊은이는 까마귀를 내쫓지 않고 오히려 친구로 삼으려는 듯 말을 건넨다.
“까마귀야, 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느냐? 결국 여기서 내 몸을 먹이로 삼으려 하느냐?”
예전에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걸 들었던 이 곡이 내 마음에 깊이 침전돼 남아 있었다. 노래한 이는 쿠바스트호프Thomas Quasthoff(1959~ )다. 그것이 늪 밑바닥에서 떠오르듯 되살아났다. 나의 긴 여행도 그만큼 ‘죽음’에 다가가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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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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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