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주 목적은 광주에서 열리고 있던 신경호·임옥상 2인전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3월의 대지진과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의 많은 벗들이 우리를 걱정해주었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이 기회에 벗들에게 건강한 얼굴이라도 보여주자는 생각도 있었다.
예전에 묵었던 적이 있는 광화문 근처의 장기체류용 레지던스 호텔에 방을 얻었다. 예전이란,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썼던 대로 2005년 12월을 말한다. 순식간에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그때는 한국사회를 거의 아무것도 몰랐고 벗이나 지인도 거의 없었다.
그리운 사람들과 회식을 한 다음 날 아침 6년 전과 마찬가지로 방에 비치된 라디오를 켜 봤다. <KBS> 클래식 FM방송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잠을 깬 F가 침대에 누운 채 “슈베르트네요…” 하고 말했다.
분명 슈베르트의 가곡이었다. 노래하는 사람은 누구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1925~ ) 같았으나, 늘 흔들림 없이 자신만만한 디스카우와는 좀 다르게 들리기도 해서 확신이 서질 않았다. 잠시 잠자코 듣고 있던 F가 불쑥 말했다. “어쩐지 애처로워요…”
노래가 끝나고 여성 아나운서가 곡명과 디스카우라는 이름을 얘기했다.
“아니, 디스카우가 이런 식으로 부른단 말이야…” 지금까지 수없이 디스카우의 노랫소리를 들은 F도 확신이 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월이 꽤 지난 녹음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듣고 있는 우리 쪽이 늙어서 귀가 변한 탓일까.
라디오는 슈베르트에 이어 쇼팽의 짤막한 피아노곡을 내보냈다. 한국에서는 슈베르트와 쇼팽을 많이 듣는다. 한국사람들의 정서에 낭만파 음악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한데, 낭만파의 유려한 선율 속에 감춰진 죽음에의 유혹을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문득 전날 밤 만났던 벗들 중 한 사람이 흘린 말이 떠올랐다.
“잘 모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한국은 일본보다 더한 자살대국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유교적 전통 때문인지 또는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 자살에 관한 얘기는 암묵적으로 터부시하고 회피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이 낭만파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지만, 오히려 그만큼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
전근대의 일은 차치하고라도, 식민지시대부터 군정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조선이라는 장소에서 죽음은 매우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지금 일본에서는 원전 사고 때문에 사람들이 방사능 위협 속에 살고 있지만, 분단된 조선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늘 전쟁의 위협에서 해방된 적이 없다. 어느 쪽이든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어느 정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이번 여행의 목적인 전시회는 ‘5월, 기억과 환생 - Memento Mori’라는 테마다. 5.18의 죽은 이(死者)들을 잊지 마라, 라는 취지다. 신경호 화백의 출품작 <넋이라도 있고 없고: 초혼招魂>은 무당이 죽은 이의 혼과 교신할 때 대나무 장대竹竿에 걸어 놓은 붉은 치마를 그린 것이다. 이것을 ‘빨갱이’ 깃발이라고 의심한 군사정권에 오랫동안 압수당했다고 한다.
쇼팽의 곡이 끝난 뒤 아나운서가 “연주는 임동혁이었습니다”라고 얘기한 듯한데, 임동민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내게는 한국 여성 아나운서의 속삭이는 듯한 발음을 정확하게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임동혁이라면 나와 F는 2008년이든가 2007년에 <KBS> 홀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 호리호리한 청년,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아직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 용모대로 부드러운 터치로 섬세한 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한 번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걸 떠올렸다. 저 애처로워 보이던 소년은 이제 청년이 돼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임동혁은 성장하고 디스카우는 늙어간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아, 시간이 흔들리는 물결을 타고
이슬에 젖은 날개로 내 앞에서 사라져 간다.
내일도 또, 아스라한 빛의 날개로
시간은 어제와 오늘처럼 사라져 가는구나.
나 자신 더 높이 반짝이는 날개를 타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 갈 때까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물 위에서 노래함 Auf dem Wasser zu singen D.774>의 가사다. 시는 프리드리히 레오폴드 슈톨베르크 백작Friedrich Leopold Graf zu Stolberg이 쓴 것인데, 신혼여행 중에 지어 신부에게 바친 것이란다. 선율은 아름답고 피아노 반주는 석양이 잔잔하게 물결을 따라 반짝이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 기쁨 속에 죽음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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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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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