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제9교향곡 제4악장의 ‘합창’이다. 베토벤은 22살 무렵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1759~1805)의 시 「환희에 붙여 An die Freude」에 감동해서 곡을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 긴 세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1817년께부터 제9교향곡 작곡이 시작됐다. 제4악장 ‘환희의 노래’ 선율이 만들어진 것은 1822년 무렵이다. 1824년에 초고가 완성되고 그해 5월 7일 빈에서 초연됐다.
베토벤은 당시 이미 청력을 잃었기 때문에 연주가 끝난 뒤 청중의 박수를 듣지 못해, 초연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으나 알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가 그의 손을 잡고 열광하는 청중 쪽을 바라보게 했다고 한다. 잘 알려진 감동적인 일화다.
그러나 그 뒤 유럽 각지에서 몇 번인가 연주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모조리 실패로 끝나 ‘태작(?作)’ ‘연주 불가능’이라는 평가가 늘 따라다녔다. 실패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민간 오케스트라 연주 수준으로는 지금도 어려운 곡으로 유명한 제9교향곡을 능숙하게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 곡을 높이 평가해, 1872년 이래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바그너 곡 외에 연주되는 유일한 음악이 됐다. 히틀러는 베토벤과 바그너를 특히 마음에 들어 해서 1933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지휘로 바이로이트에서 이 곡이 연주됐을 때는 직접 들으러 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국내에 머물면서 활동하고 있던 푸르트벵글러는 1942년 4월 19일 히틀러 탄생일 전날 제9교향곡을 지휘했다. 연주 종료 뒤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1897~1945)와 악수하는 모습이 영화로 촬영돼 남아 있다. 푸르트벵글러 자신은 마지못해 악수한 뒤 곧바로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는 등의 진위가 불분명한 일화도 남아 있지만, 어쨌거나 그 일이 나치스의 정치선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 ‘평화’나 ‘우애’를 노래하는 가사를 담은 음악이 그 가사를 배반하고 정반대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 일은 드물지 않다.
연주 종료 뒤 푸르트벵글러와 괴벨스가 악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된다- 그 대합창의 울림 속에서 나치스는 유대인 대학살을 착착 실행했다. 나치스가 제9교향곡을 이용했다, 푸르트벵글러를 이용했다는 식의 얘기는 틀린 건 아니지만 일면적이고 불충분하다. 이 음악이 준 고양감이나 비장감은 오히려 대학살을 고무하고 촉진하는 작용도 했을 것이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아프리카에 존재했던 로디지아는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한 영국 식민자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1853~1902)의 이름을 따서 국명으로 삼은 나라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란히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를 국책으로 삼은 인종차별국가였다. 그 로디지아 국가(?歌)로 제9교향곡이 사용됐다.
1972년, 유럽의회는 유럽 전체를 상징하고 자유, 평화, 단결이라는 이상을 표현하는 악곡으로 <유럽의 노래>를 채택했는데, 그것은 제9교향곡 제4악장으로 만든 것이었다. 편곡을 의뢰받은 이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나치스가 권력을 탈취했을 때 카라얀은 울름이라는 지방도시 오페라의 신출내기 지휘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나치당에 입당하고 5년 뒤인 1938년에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로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데뷔했다. 카랴안은 전쟁 중에 나치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괴벨스의 비호를 받아 급속도로 출세했다. 그 카라얀이 편곡한 제9교향곡을 <유럽의 노래>로 삼은 사실은 이상의 고결함보다 정치의 비린내를 떠올리게 하며, 음악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다시 퀴냐르를 인용한다.
모든 경계를 없애버리는 음향은 귀를 개별화하기보다는 집단화하는데 기여해 왔다. 그것은 ‘귀를 잡아당긴다’와 같은 말로 표현된다. 국가, 도시나 마을의 브라스밴드, 찬미가, 가족의 노래 등은 집단의 동일화를 꾀하고 동향의 유대를 강화하며, 신민을 신하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세련되고 복잡한 음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듣고 눈물까지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동시에 모질고 사납게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있다는 데 나는 놀란다. 예술은 야만의 반대가 아니다.
이 연재 초기에 나는 “음악은 위험하다”고 썼다. 음악은 우리 신체에 직접 작용해서 우리가 지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깊숙이 침입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음악은 본래 선한데, 그것을 누가 악이용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음악 그 자체에 그런 폭력성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의 ‘폭력성’이라는 말은 도덕적 비난 대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매혹적인 것도 말을 매개로 하지 않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제9교향곡 제4악장의, 듣는 이를 열중하게 만드는 영웅적인 음향 그 자체 속에 불길한 것이 감춰져 있다. 베토벤만 그런 게 아니다. 예컨대 바흐의 수난곡은 한없이 숭고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경험하는 방법은 그 장대한 ‘무한선율’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취는 위험하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음악은 도취와 각성 사이에 매달려 있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뛰어난 음악가들은 세이렌과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게 몸을 바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이들, 적어도 나 자신은 배의 마스트에 내 몸을 묶게 해놓고도 이 밧줄을 풀어줘, 저 위험한 괴물이 있는 데로 가게 해줘, 하고 부르짖는 오디세우스와 같은 존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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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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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