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에서 음악이 수행한 역할을 두고 흔히 “나치스가 음악을 악용했다”는 말들을 한다. 거기에는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음악’은 때로는 ‘악’에 의해 이용당하지만 본래 ‘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음악’이 지닌 기능의 하나가 듣는 이에게 기쁨이나 위로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조피아 치코비악이나 프리모 레비가 증언하고 있는 폭력성은 음악의 악용일까, 아니면 음악 그 자체의 속성일까?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고찰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파스칼 퀴냐르Pascal Quignard라는 사람이 쓴 『음악에 대한 증오 La Haine de la Musique』(다카하시 게이高橋啓 옮김, 세이도샤?土社, 1997)라는 책이다.
퀴냐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참조한다.
“세이렌들이 꽃피는 들에서 노래하고 있다. 주변에는 잡아먹힌 사람들의 뼈가 흩어져 있다.”
세이렌Seiren이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이다. 상반신은 여인,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해서 죽인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항해 도중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어 선원들에겐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게 하고 자신을 마스트에 꽁꽁 묶어 풀어지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노래가 들려오자 오디세우스는 세이렌 쪽으로 가려고 미쳐 날뛰면서 제발 줄을 풀어달라, 저 매혹적인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르짖는다. 그 노래는 “마음을 온통 듣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채운다.”
선원들이 밧줄을 풀어주지 않았기에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았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었는데도 살아남은 인간이 나타나면 세이렌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세이렌은 자살하고 주검은 바위가 됐다. 그러나 그 노래만은 죽지 않아 지금도 선원들이 그것을 들으면 그들이 탄 배는 침몰한다고 한다. 세이렌은 영어 사이렌(siren)의 어원이기도 하다.
다가가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 거절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음악인 것이다. 이하 퀴냐르의 의미심장한 얘기를 몇 구절 인용해보겠다.
모든 음(音)은 눈에 보이지 않게, 외피를 관통하는 드릴(drill)로 다가온다.
음은 피부를 알지 못하며, 한도 또한 모른다. 거기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즉, 무한의 수동성(불가시(不可視)의 강제적인 수용)이야말로 인간 청각(??)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끝까지 졸이고 졸이면 이렇게 된다. 귀에는 눈의 눈꺼풀 같은 게 없다.
음에 대해서는 자아의 밀폐성 따위가 있을 수 없다. 음은 곧바로 몸에 와 닿는다. 음 앞에 선 몸은 마치 벌거벗은 것과 같고, 피부가 벗겨진 것과 같다.
음향체험은 언제나 개인적인 체험의 저 너머에 있다. 내부 이전(以前)이자 동시에 외부 이전이면서 망아상태(忘我?態, trance로 몰아가는 것이다. 망연자실(茫然自失, panic) 상태에서 운동감각을 관장하면서 신체의 모든 부위를 뒤덮고 심장박동과 호흡의 리듬을 덮친다. 수동적이지도 않고 능동적이지도 않다.
음악은 샤머니즘에서 확실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다른 세상과 교신하며 그곳 얘기를 전하는 사람(languist), 즉 샤먼과만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호흡이 출산 때의 울부짖음과 함께 시작되듯이 빙의(憑依)를 작동하게 하는 부르짖음인 것이다.
무엇 때문에 청각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데로 통하는 문이 준비돼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청각우주(??宇宙)는 그 기원부터 저 세상과의 특권적인 왕래를 본질로 삼아온 걸까.
여기서 퀴냐르가 얘기하고 있는 대로 음악은 인식전달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감각이나 감정을 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거기에서는 언어적 이성(예컨대 도덕률이나 법)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의 무당이 어떤 격렬한 리듬이나 기묘한 선율에 몰입해 다른 세계[異界]와 교신하는 모습에서 음악이라는 것의 탄생 비밀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은총임과 동시에 폭력이기도 하다.
오 벗이여, 이런 소리[音]가 아니네!
우리는 더 기분 좋고
더 환희로 흘러넘치는 노래를 부르려는 게 아닌가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영감이여
천상 낙원의 처녀여
우리는 불처럼 도취해
숭고한 그대(환희)의 성소에 들어가노라
그대의 마력(魔力)은 다시 합치리
시류(時流)가 갈가리 찢어 놓은 그것
모든 사람은 형제가 되리라
(이하 생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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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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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