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르케나우의 여성 수인 사동에 수용된 말러의 조카딸 알마 로제를 친위대는 여성 수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했다. 이것은 자유를 빼앗긴 음악가에게 그나마 음악만이라도 돌려주겠다는 연민과 온정의 발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힘러 앞에서 레하르를 연주한 지휘자는 이 알마 로제였다.
파리 음악원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됐던 여성 수인 파니아 페느론은 알마 로제의 지도가 때론 냉혹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격했다며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런던의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연주하기라도 하듯 착각하고 있는 같아.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이토록 배를 곯고 있다는 걸 연주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동정이라곤 아예 없는 걸까. 외숙부 구스타프 말러한테서도,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한테서도 진정한 사랑을 느낀 적이 없는 걸까. 알마, 당신이 요란스레 떠드는 건 ‘정확한 연주’뿐이잖아…”
그런 파니아에게 알마 로제는 “당신은 몰라. 지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겐 연주를 계속해야만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주어졌던 것이다. 알마의 가차없는 지도가 없었다면 단원들이 살아남을 찬스는 더욱 줄었을 것이다. 알마 로제는 1944년 4월 수용소에서 갑작스레 죽었다. 독살설이 있지만, 상한 통조림 때문에 걸린 보툴리누스 균 중독사라는 설도 있다.
2003년 일본 <NHK>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죽음의 나라 선율>에는 이 여성 수인 오케스트라 생존자가 등장한다. 1923년 포즈나니에서 태어난 폴란드인 조피아 치코비악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8살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그녀는 1939년 독일군 침공 뒤 반나치 분자로 체포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유대인 수용소로 알려진 아우슈비츠는 처음에는 폴란드인 정치범, 나중엔 소련군 포로 등도 수용했다.
수용소에서 생환해 80살이 되도록 크라쿠프 교외에 살고 있던 이 여성은 “내 죄와 대면하기 위해” 수용소를 다시 찾았다. 죄라고?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우슈비츠에는 여성 수인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3개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주요 임무는 계속 이송돼오는 수인들을 환영하기 위한 연주였다. 가스실로 보낼지 강제노동에 처할지, 말하자면 즉사시킬지 서서히 죽일지를 선별하는 플랫폼에서 수인 악단이 요란스런 음악을 연주했던 것이다. 조피아는 죽을 차례를 기다리는 행렬에 늘어선 수인들이 그 사실도 모르는 채 “오케스트라가 있을 정도면 여기도 그다지 나쁜 곳은 아니야” 하고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곳이 죽음의 공장이라는 사실을 호도하고 대량살육을 더 효율적으로 자행하기 위해 음악이 동원됐던 것이다.
매일 강제노동에 혹사당하는 수인들을 환영하고 환송하는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수인들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착취하는 역할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1919~1987)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곡의 종류는 얼마 되지 않는다. 10여 곡 정도다. 아침과 저녁 매일 같은 곡이 연주된다. 독일인에겐 모두 익숙한 행진곡이나 유행가다. 우리 머릿속에는 이런 음악이 깊이 각인돼 있다. 라게르(수용소)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최후의 것이 되리라. 이것은 라게르의 냉철한 광기를 들을 수 있도록 표현된 라게르의 소리다. 우리의 인간성을 먼저 파괴하고 이어서 육체를 서서히 탐하려는 타자의 결의를 보여주는 소리인 것이다.
이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안개 짙은 광장에서 동료들이 자동인형처럼 행진하기 시작한다는 걸 안다. 그들의 혼은 죽었다. 따라서 바람이 마른 잎을 흩날리듯 음악이 그들을 다그치며 의지의 대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의지가 없다. 고동(鼓動) 하나하나가 한 걸음이 된다. 축 늘어진 근육이 반사적으로 수축한다. (…) 이것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저 아무 죄도 없는 노래 하나라도 기억 속에 되살아나면 혈관이 얼어붙는다.
여성 수인 오케스트라는 교수형 집행장에서도 경쾌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죽음의 블록>이라 불린 징벌사동에서 옷도 없이 벌거벗은 채 갇혀 있는 여성 수인들 앞에서 연주한 적도 있다. 여성 수인들은 음악을 통해 치유받기는커녕 “하느님, 이런 데서 음악이라니요!”라며 울부짖었다. 그건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파괴였다. 그렇게 조피아 치코비악은 증언하고 있다.
음악이라는 특기를 지녔기에 우대받은 악단원들은 다른 수인들한테는 모멸과 원한과 한탄의 대상이기도 했다. 음악으로 대량살육에 가담하고 있다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한 조피아는 수용소 당국에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알았다. 오케스트라냐 징벌노동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라는 것이었다. 징벌노동이 의미하는 것은 완만하지만 확실한, 고통과 굴욕에 가득 찬 죽음이다. 조피아는 결국 오케스트라를 택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패배한 겁니다”라고 80살의 그녀는 고백한다.
조피아는 전쟁이 끝난 뒤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됐다. 해방된 지 10년이 지나 큰맘 먹고 가본 콘서트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 아리아를 듣고 까무라쳤다. 수용소에서 자주 연주했던, 친위대가 좋아하던 곡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자행하는 구극적인 폭력의 모습, 그리고 그 폭력 때문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고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음악은 과연 어떠한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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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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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