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내가 처음 찾아간 것은 1996년 여름이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한 번은 가봐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몇 사람의 벗들과 F도 동행했다. F는 그곳에 도착하자 말했다. “이 냄새, 몰라? 냄새나잖아요!” 그 일대에 독특한 냄새가 떠돌고 있다는 거였다. 그것이 시체 썩는 냄새가 분명하다고 그녀는 거듭 얘기하며 격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신경이 곤두서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뒤 다시 두 번 더 그곳에 갔다. 2002년 봄 <NHK> 방송스탭들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갔다. 2005년 봄에는 대학생 몇 명과 더불어 연수여행을 갔다. 모두 세 번 찾은 셈인데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 특별한 장소는 아우슈비츠다. 폴란드 남서부의 고도 크라쿠프Krakow에 가까운 오시피엔침O?wi?cim이라는 마을인데, 나치스가 그렇게 이름을 바꾸고 거기에 1940년 4월부터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제2수용소(통칭 비르케나우Birkenau)는 제1수용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황막한 저습지대에 1941년 건설했다.
현재 이들 수용소군(群)은 폴란드 국립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제1수용소 뒤에는 희생자들의 모발, 신발, 여행가방, 안경, 의족 등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수인들을 약품으로 살해한 의무실, 굶기거나 질식시켜 죽인 지하방이 있는 징벌동(棟)도 남아 있다. 비르케나우 수용소 유적지에서 우리는 희생자들 사체를 쌓아놓고 태운 숲, 타고 남은 재를 버린 탁한 연못, 희생자들한테서 빼앗은 약탈품을 저장한 창고 터(그것은 ‘무한의 자원’이라는 의미의 ‘카나다’로 불리고 있었다), 동그란 구멍들만 죽 뚫려 있는 변소, 도착한 수인들을 가스실로 보낼지 강제노동에 내보낼지를 재빨리 선별한 플랫폼 등을 봤다. 거기서 펼쳐진 극한적인 냉혹과 잔학의 기운이 지금도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44년 봄 그곳에 프란츠 레하르Franz Lehár가 작곡한 <즐거운 미망인 The Merry Widow>의 경묘(?妙)하고 향락적인 선율이 흘렀다. 히틀러가 좋아한 오페레타다. 청중은 전체 강제수용소조직 최고책임자인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1900~1945)와 나치스 친위대의 한 무리. 작은 야외무대에서 연주하고 있는 것은 여성 수인(囚人)만으로 편성된 오케스트라였다. 지휘자도 수인이었는데, 그 이름은 알마 로제Alma Rosé.
알마 로제는 1905년 아버지 아르놀트 로제Arnold Josef Rosé(1863~1946)와 어머니 유스티네의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랜 세월 빈 궁정가극장과 빈 필의 콘서트마스터concert master로 일한 명 바이올린 주자였으며, 빈 음악원 교수이기도 했다. 형인 에두아르트와 ‘로제 카르테트Quartet(4중주단)’를 결성하고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초연하는 등 뛰어난 활동을 펼쳤다. 어머니 유스티네는 구스타프 말러의 가장 가까운 누이다. 즉 알마 로제는 구스타프 말러의 조카딸이다. 큰외숙모(伯母,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한테서 알마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부모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녀는 훌륭한 바이올린 주자가 돼 1930년대에는 ‘빈의 왈츠 여인들’이라는 여성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유럽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벌였다.
나치스는 독일에서 정권을 탈취한 1933년 이후 사회 모든 영역의 유대인 배척정책에 착수했는데, 음악을 비롯한 예술 영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거친 파도는 1938년 독일이 병합한 오스트리아에도 밀려왔다.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많은 유대계 음악가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연주기회를 박탈당했으며, 망명길로 내몰렸다. 아니 망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행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말러의 처 알마는 1938년 독일에 병합당한 오스트리아에서 세 번째 남편 베르펠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했으며, 1940년에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당하자 남프랑스에서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브루크너와 말러의 귀중한 악보 초고를 지닌 채 떠난 힘든 망명길이었다. 망명 뒤 나치스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담은 회상기를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것은 이미 얘기한 대로다. 그녀는 85살까지 살다가 1964년 망명지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말러의 오랜 벗으로 말러 회상록을 쓴 물리학자 아르놀트 베를리너는 1942년 수용소로의 이송 처분을 받자 자살했다. 그때 나이 80살이었다.
로제 형제의 형 에두아르트는 말러의 누이 엠마와 결혼했으나 1942년 테레젠슈타트 수용소로 이송돼 그다음 해 사망했다. 그때 83살이었다.
아르놀트 로제는 딸 알마와 함께 런던으로 몸을 피했다. 딸은 생활비도 벌 겸 종종 유럽 대륙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네덜란드 체류 중에 독일군이 침공해오는 바람에 런던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몰래 연주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 그녀는 스위스로 피신하던 도중 프랑스 디죵에서 체포돼 1943년 7월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그 지독한 집요함과 철저함이라니.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살벌한 악의의 대상이 돼야 했던 시대. 그런 시대를 보기 전에 말러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에겐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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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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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