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의 교향곡은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한 시대’, 계몽주의를 거쳐 자유주의 개혁에 이르는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 것이었다. 그 종언의 노래는 위대한 환희의 도래를 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길한 죽음의 예감으로 가득 찬 것이다. 사실 말러의 사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유럽의 자기분열은 극한에 도달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것이 끝나고 불과 십수 년 뒤에는 파시즘이 대두해 두 번째의 세계대전과 함께 유대인의 대량추방과 살육이 자행됐다. 계몽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국민’의 대열 속에 포함됐던 ‘유대인’은 다시 ‘국민’ 바깥으로 추방당했다.
1937년 나치당 정권하의 독일에서 ‘유대인 또는 혼혈 유대인’이 작곡한 음악의 출판이나 연주를 모두 금지하는 법령이 공포됐다. 그 해에 발행된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독일이나 그 밖의 나라 음악의 긴 역사를 보더라도 유대인이 수행한 역할은 빈약하고 어차피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따라서 1933년 이후의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배척은 먼 옛날부터 내려온 가치 있는 문화를 지키고 그 소멸을 막기 위해 취해진 조처였을 뿐이다. 구스타프 말러와 같은 무리는 지휘자로서는 평가를 받지만 한편으로는 작곡가로서, 듣는 데 하룻밤이 걸리는 교향곡 따위를 만들어낸다. 외견상 브루크너를 모방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민족정신과의 깊은 교감이나 전승이 완전히 결여돼 있다. 말러는 본래 민족적인 원모순성原矛盾性으로 가득 차고 극도의 분열증에 빠진 인물이다.”(사쿠라이 겐지?井健二 <말러와 히틀러> 후타미쇼보二見書房 참조)
말러의 음악이 민족적인 모순성으로 가득 차고 분열증적이라는 건 사실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한 예술적 미점(美点) 이지만, 나치스 입장에서 보면 신성한 ‘독일예술’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모독이었던 것이다.
압바도의 지휘로 말러의 문이 열린 지 하루 뒤 나와 F는 루체른 호수의 호안 트립센Tribschen이라는 곳까지 산책을 했다. 그 여름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는 이상기후로 계속 비가 내려 각지에서 홍수와 산사태 피해가 속출했다. 여느 때라면 밝은 햇살을 듬뿍 받은 관광선이 오갈 호수는 차가운 가랑비로 희뿌옇게 흐려 있었다.
트립센에는 1866년부터 1872년까지 바그너가 살았던 저택이 있다.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6년간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를 완성했다. 1938년에 이 저택 앞에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1867~1957) 지휘로 특별공연(gala concert)이 열렸는데, 그것이 루체른 음악제의 기원이 됐다. 지금은 박물관이 돼 바그너가 사용하던 갖가지 사물(私物)들, 악보, 악기 등이 전시돼 있다.
거기에 전시돼 있는 바그너의 사진을 보고 F는 얼굴을 찌푸리며 살짝 몸을 떨었다. 사진의 바그너는 자그마한 체구에 머리만 컸는데, 정력적이고 거만한 인상이었다.
잠시 뒤 그녀는 슬며시 한마디 했다. “옛날이 행복했어요…”
“응?”하고 반문하자 F는 거미집에 붙잡힌 곤충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나는, 바그너 음악을 몰라선 안 돼,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베를린 독일 오페라의 일본공연으로 주변엔 바그너에 심취한 사람들이 많았죠. 한데 몇 번이나 도전해봤는데도 나는 도무지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어디가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죠. 그래서 당시 나는 바그너라는 인간은 차별적이고 권력지향의 인간이니까 그 음악도 신통찮은 거야, 좋아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거야,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죠. 말하자면 나는 정의의 편이었죠.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싫은 인간의 음악에 빨려들어요. 꺼림칙한 매력에 몸을 맡기고 매료당해요. 고통스러울 정도의 자기분열…”
나는 F와 2000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봤다. 그때는 몸이 아팠던 압바도 대신에 로린 마젤이 지휘를 했다. 다음에 우리는 2001년 12월에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파르지팔>을 봤다. 그것이 F에겐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 바그너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바그너는 1813년에 태어났고, 말러는 1860년생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거의 반세기나 된다. 빈의 가난한 음악학도였던 젊은 시절의 말러도 또한 ‘바그너 열병’을 앓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신의 황혼>에 빠져 볼프와 또 한 사람의 학우, 세 사람이 심야에 3중창을 질러대다가 하숙집에서 쫓겨났다. 단 한 번 극장 휴대품 보관소(cloak)에서 외투 소매에 팔을 끼우느라 애를 쓰는 바그너를 보고 도와주려 했으나 주눅이 들어 그만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바그너와 말러를 떼어놓은 반세기라는 시차는 중대하다. 처음에는 자유주의 정신에 공감해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참가해서 스위스로 정치망명까지 한 바그너는 그 뒤 평생 ‘독일정신’이라는 관념을 추구했다. 말러는 ‘독일정신’(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국민정신’이라는 것)에 내재하는 모순과 분열을 예술화했다. 한편으로는 구축(構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탈구축했던 것이다. 1850년 바그너가 익명으로 발표한 「음악에서의 유대인성」이라는 논문은 반유대주의의 성전(聖典)이 됐다. 바그너는 그의 사후 나치스에 의해 신성화되었고, 말러는 철저히 배척당했다. 이 두 사람을 나누는 분단선은 근대라는 ‘한 시대’ 그 자체가 내포한 분단선이기도 했다.
2, 3일 더 루체른에 머문 뒤 우리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날도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암울한 비구름에 덮여 있었고, 큰 비가 내렸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탑승시간에 맞추느라 우리는 마지막까지 안달복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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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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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