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러론을 요약하면서, 무라이 쇼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성이 인류를 행복한 미래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아직 낙관적(optimistic)으로 믿고 있던 100년 전이라면 모르겠거니와, 말러가 제7교향곡을 작곡한 20세기 초는 계몽주의의 이런 프로젝트가 파탄 났다는 건 누구의 눈에도 명백해진 시대였다. (…) 말러가 한 일은, 교향곡이라는 전통 형식이 명하는 바에 따라 해피엔딩을 계속 만들어가는 게 1905년 시점에선 이미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부고발이었다.”(무라이의 앞 책)
나는 오랫동안 말러의 음악에 대해 안개가 낀 듯한 애매한 이미지밖에 갖고 있지 못했다. 일본에서 말러가 활발하게 연주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그전에 내가 클래식 음악을 만나고 그 속에 빠져 있던 1960년대는 뭐라 해도 베토벤과 브람스, 즉 ‘전통적인 교향곡 형식’이 주류였다. 그것이 내 음악관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 같다.
말러는 1910년 8월 네덜란드 라이덴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정신분석적 대화’를 나눴다. 이것은 알마와 그로피우스의 정교관계가 발각돼 말러가 큰 타격을 받은 해이고 죽기 전 해의 일이다. 이 두 유대인의 만남은 ‘하나의 시대’를 가르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에 대해 프로이트가 전 모나코 공국 왕녀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얘기한 일화가 남아 있다.(무라이의 앞 책)
얘기하는 도중에 말러는 돌연 자신의 음악이 지고의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려는 순간 왜 어느 때고 훼방꾼이 끼어드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고 했다. 지극히 깊은 정서 속에서 가장 고귀한 패시지(passage, 경과구)가 떠올라도 그것으로 클라이막스에 도달하지 못하고 언제나 진부한 선율이 끼어들어 와 엉망이 돼버리고 만다. 그의 부친은 폭군이었던 듯, 아내를 혹독하게 대했다. 말러가 어렸을 때 어느 날 부모 사이에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소년에겐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던지 그는 집을 뛰쳐나갔다. 바로 그때 거리에서 수동식 오르간이 당시 빈에서 자자했던 유행가 <오, 사랑스런="" 아우구스틴="">을 연주하고 있었다. 말러 생각에 따르면, 그때 이후 숭고한 비극성과 경박한 오락성의 병치(倂置)가 그의 마음속에서 단단히 결합하게 됐다. 어느 한 쪽 기분이 얼굴을 내밀면 필연적으로 다른 쪽도 동시에 고개를 들이밀게 됐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만큼 말러 음악의 특징을 평이하게 설명해주는 얘기도 없을 것이다. 무라이 쇼에 따르면 “말러가 수동 오르간 음악을 교향곡에 끼워 넣은 것은 클래식 음악이라는 규범, ‘숭고한’ 예술음악/ ‘경박한’ 민속음악이라는 서열(hierarchy)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오, 사랑스런="" 아우구스틴="">은 “그냥 경박하기만 한 유행가는 아니다.” 이 노래의 테마는 만취해서 잠에 빠져든 사이 페스트 사망자들과 같은 굴 속에 내던져진 거리의 악사 얘기다. 그 가사에는 “페스트의 죽음의 냄새가 짙게 감돌고 있다.”
오, 사랑스런 아우구스틴
돈은 떨어지고 사람들도 사라졌다
오, 사랑스런 아우구스틴
모든 게 다 사라졌다!
예전엔 나날이 축제였다
지금은 근처가 온통 페스트 천지
거리도 온통 시체뿐
있는 거라곤 그것뿐!
오, 사랑스런 아우구스틴
무덤에라도 들어가 눕는 게 좋아
오, 사랑스런 나의 빈
모든 게 다 사라졌다!
“처음에 말러의 음악은 기분 좋은 상투적 표현과 속이 매스꺼운 듯한 표현의 반복, 비네트(주위를 흐릿하게 만든 경치나 초상의 사진이나 그림)를 보면 떠오를 것 같은 과거 풍경 전체에 의존하고 있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말러 작품의 제1인상을 건너뛰고 갈 수는 없다. 거기는 아직 대기실일 뿐인데…”(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오늘의 말러’ <음악수첩 말러="">)
이거다. 이게 바로 나였다. 나는 ‘대기실’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불레즈는 계속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말러에 매료당하는 이유는 한 시대-이제 한 시대가 그 타버린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어야만 했던 시대-의 종언을 치열하게 간파해낸 상상력(vision)이 지닌 최면력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고 얘기한다. 확실히 루체른의 밤, 나는 ‘대기실’에서 커다란 홀로 발을 들여놓았고, 끝나버린 ‘한 시대’의 환영幻影=vision을 보았던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은 전근대 기독교사회에서 오랫동안 차별받는 신분이었던 유대교도를 개방했다. 거기서 생겨난 근대 ‘유대인’이라는 존재형식은 유럽 ‘내부의 타자’가 됐다. 마이너리티(minority)인 그들의 눈에 비친 유럽사회는 머조리티(majority)인 기독교도의 눈에 보이는, 일원적이고 통일적인 가치관이 관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다원적이고 자기분열적인 사회였다. 말러의 음악은 계몽주의의 자기모순을 껴안은 ‘유대인’이라는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유럽이 처음으로 ‘내부의 타자’를 발견한 시대의, ‘내부의 타자’였기에 비로소 그려낼 수 있었던 자기분열적인 유럽의 자화상인 것이다.
(계속)
--------------------------
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
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 >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 >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