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의 음악은 짙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 사실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접(接)한 것은 괴르네의 노래를 통해서였다.
말러가 자란 마을에는 병영이 있었고, 어린 그는 군악대의 큰북이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술 양조업자로 선술집도 경영하고 있던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알마에 따르면, 항상 여직원 엉덩이를 쫓아다닌 ‘육욕(肉欲)의 덩어리’였다. 어머니 마리는 거의 해마다 임신을 해 14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8명이 일찍 죽었다. 동생인 오토는 음악 재능이 있었으나 권총자살로 21살 생을 마감했다.
말러는 1904년 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uckert(1788~1866)의 시에 곡을 붙인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작곡했다. 그것을 알마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30분 전까지 기운차고 건강한 아이들을 안아주고 키스도 해주고는 아이들 죽음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당시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농담 아니에요. 당신은 벽에 악마를 그려놓고 악마를 부르고 있는 사람 같아요!’”
실제로 그 3년 뒤 알마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해, 어린 장녀 마리아 안나가 디프테리아와 성홍렬에 걸려 숨졌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예술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 것이다.
잘츠부르크에서 괴르네를 들은 그다음 날 우리는 스위스 취리히로 날아가 루체른Luzern 음악제를 찾아갔다. 취리히 공항에서 철도로 1시간 정도 가니 루체른이었다. 내겐 22년만이었다.
숙소는 루체른 호에 걸린 다리를 건너 옛 시가지 한복판에 있었다. 접수처의 젊은 여성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좁은 방. 냉장고도 없다. 목욕통도 없는 샤워실. 그래도 하룻밤 자는데 190프랑이다. 오스트리아에 비해 물가가 이렇게 높다니!
다음 날 로젠가르트 콜렉션Rosengart Collection을 봤다. 피카소 만년의 뛰어난 콜렉션인데, 그 밖에 수틴Chaim Soutine(1893/94~1943),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 마리노 마리니Marino Marini(1901~80), 클레Paul Klee(1879~1940) 등이 전시돼 있었다. 2002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을 찾아보는 것도 루체른 여행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밤에 콘서트에 갔다. 잘츠부르크에서 친해진 이와시타 교수 부부와 그 집 아이를 그곳에서 만났다. 이와시타 주니어는, 콘서트는 그렇다 치고 장 누벨Jean Nouvel(1945~ )이 설계한 거대한 콘서트 홀 자체에 흥분하고 있었다. 우리 자리는 3층 오른쪽 발코니였다. 무대를 내려다보면 마치 골짜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클라우디오 압바도가 지휘하는 루체른 축제 관현악단. 전반의 프로그램은 르네 플레밍이 부르는 알반 베르크와 슈베르트의 가곡들이었다. 실은 이게 나의 주 표적이었다. 후반의 말러는 그다음이었다. 특히 교향곡 제7번은 실패작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없고 별로 연주도 되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연주가 대단했다. 긴 연주가 순식간에 끝났고 정신을 차려보니 만장의 갈채와 함께 나도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말러의 교향곡 가운데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들었던 말러는 언제나 납득이 가질 않았으나 이건 전혀 달랐다. 베토벤 풍의 장엄,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용장(勇?), 흙내 나는 선율,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왈츠, 소 방울이 울리는 티롤 민요. 19세기 말 합스부르크 제국을 구성하는 온갖 요소들이 ‘조인트’돼 커다란 태피스트리(tapestry, tapisserie)처럼 전개됐다.
더구나 제국의 몰락, 붕괴, 죽음을 암시하는 종말부의 고양?揚과 비장悲?. 그런 것들이 바그너나 브루크너처럼 어느 특정 종교관이나 철학에 의해 통일적으로 구성돼 있는 게 아니라 콜라주되고 ‘조인트’돼 있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거대한 음향공간에 콜라주한다는 건, 즉 분열돼 무너지고 있던 제국 그 자체를 커다란 화폭에 그려놓는 것과 같다. 거기에 일관된 메시지는 없다. 있는 것은 분열된 메시지다. 그걸로 좋은 것이다. 그것이 말러의 독자성이고 매력인 것이다. 그런 얘기를 콘서트가 끝난 뒤 나는 흥분해서 F에게 털어놨다.
“인제 알겠어요?”라면서 F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당신이 얘기한 ‘조인트’가 손에 잡힐 듯이 보였어. 압바도 덕분인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게르기예프, 래틀, 에센바흐 등에서는 닫혀 있던 말러로 가는 문이 왜 압바도에 의해 열린 것일까? 음악평론가 구로다 교이치?田恭一는 말러의 음악에는 매우 도시적인 것과 흙내 나는 것이 혼재돼 있어서 제임스 레바인James Levine(1943~ ) 지휘에서는 전자가, 라파엘 쿠벨릭Rafael Jeroným Kubelík(1914~96) 지휘에서는 후자가 부각된다고 했다.(아와즈 노리오粟津則雄와의 대담 『말러의 세계, 말러의 현재』) 즉 다양한 테마의 콜라주인 말러의 교향곡은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크게 그 표정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러 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압바도의 해석과 지휘는 어디가 다른 지휘자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걸까?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건 내 힘에 부친다. 그저 음악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을 할 따름이다.
(계속)
--------------------------
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
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