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뭐야! 하고 힐문하는 말러에게 알마는 “가슴 속 울증을 남김없이 털어내면서” 몇 년 동안이나 말러가 “터무니없는 사명감의 포로”가 돼 자신을 홀대해 온 것을 책망했다. 그리고 알마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돌연 자신의 죄를 자각했다.” 말러는 밤중에 어두운 데 서서 자고 있는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거나 오두막 별장 바닥에 엎어져 울기도 했다고 한다.
그로피우스가 토브라하 별장을 방문했을 때 말러는 “당신 좋을 대로 하라”며 알마와 그로피우스 단둘이 있도록 해주었다. 알마는 말러 곁에 남는 쪽을 택했고 실의에 빠진 청년은 홀로 떠나갔다. 하지만 알마는 아직 그로피우스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진 않았다.
1910년 9월 뮌헨에서 제8교향곡이 말러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다. 음악사상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야 할 연주였다. 공연이 끝난 뒤 연주자 1,000명과 청중 3,000명, 합계 4,000명의 환호성이 반 시간이나 이어졌다. 연주를 들은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vski(1882~1977)는 그 인상을 “최초의 백인이 본 나이아가라 폭포”에 비유했다.
지휘대의 말러는 죽음이 불과 8개월 뒤로 다가와 있는 줄도 모른 채 인생의 절정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의 교향곡을 누군가에게 헌정하거나 하진 않았는데 제8번은 아내인 알마에게 바쳤다. 하지만 이때 그로피우스도 뮌헨에 체류하고 있었고 알마는 그와의 밀회를 거듭했다. 알마는 나중에 일기에서 정직하게 고백했다. “구스타프의 죽음-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그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몇 개월 뒤 뉴욕에 돌아가 병이 더욱 악화된 말러를 헌신적으로 간병하면서 알마는 그로피우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지금 내 감각은 경직돼 있습니다만, 그래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내 속의 모든 것이 되살아나 꽃피우리라는 걸. 부탁해요, 사랑을! (…) 당신의 신부 알마.”
무라이 쇼는 말러의 실패 원인이 ‘죄를 자각’하고 알마에게 항복한 데 있다고 썼다.(무라이의 책) 알마가 끌린 것은 항상 자신보다 더 지배욕이 강한 남성이었다. 말러가 자신에게 항복하고 ‘약한 남자’가 된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은 식었다. 말러의 사후 알마의 두 번째 남편이 된 그로피우스도 이때의 말러와 같은 길을 걸어 그녀한테서 배신당하게 된다.
다만 말러가 알마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고 해서 그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단순하지 않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말러의 음악처럼 평범한 조화와는 사뭇 거리가 먼데, 동전의 양면처럼 고통을 머금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다. 알마의 회상을 조금 인용해보자.
“유대인 문제는 말러의 신변에 늘 붙어 다녔다. 때로는 그 때문에 몹시 시달렸다. 특히 그가 존경하는 코지마 바그너Cosima Wagner(프란츠 리스트의 딸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두 번째 아내-필자주)가 그가 유대인인 주제에 빈의 영예로운 자리(궁정가극장 음악감독-필자주)에 앉으려 한다며 방해한 것은 그를 몹시 힘들게 했다. 왕실 기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 그는 세례를 받아야 했다. (…) 그러나 그는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또 설령 유대교에 부정적이고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잊어버리진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잊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 그 앞에서 유대인을 조롱하는 건 금물이었다. 그는 정말로 화를 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옳았던가.”(알마 말러 『구스타프 말러, 사랑과 고뇌의 회상』)
알마는 말러의 가장 훌륭한 이해자였고 옹호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자신의 미의식이나 욕망과도 합치했다.
말러의 사후 알마는 한때 오스카 코코슈카와 열렬한 정교(情交)를 맺었다. 그 뒤 그로피우스와 결혼했으나 이윽고 헤어졌고, 그다음에는 유대인 작가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1890~1945)과 결혼했다. 오스트리아가 나치스 독일에 병합당하자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제2차 대전 발발 뒤인 1940년 조국 오스트리아에서는 출판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적나라한 회상기를 출판했다. 일본어판 번역자인 이시이 히로시石井宏는 이 출판이 휴머니즘을 지키려는 알마의 “제3제국에 대한 통렬한 도전장”이었다고 썼다. 1964년 미국에서 85살의 생애를 마친 알마의 유해는 빈으로 옮겨져 말러와 같은 묘지에 묻혔다.
나와 F는 묘지를 나와 그린칭 주변을 걸었다. 포도밭이 펼쳐져 있고 직접 짜낸 와인을 마실 수 있는 호이리게Heurige라 불리는 주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겨울의 공휴일인데도 의외로 많은 호이리게가 문을 열었다. 줌 마르틴 제프Zum Martin Sepp라는 오래된 가게에 들어가 자가양조 와인 반 리터와 감자를 곁들인 돼지고기 요리 한 접시를 시켜놓고 F와 나눠 먹었다. 얼어붙었던 몸에 다시 따뜻한 피가 돌았다. 값은 모두 30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싸다.
“내게는 3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선 보헤미아인이어서, 독일인 사이에선 오스트리아인이어서, 지상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선 유대인이어서.”
잘 알려져 있는 말러의 말이다. 와인의 취기가 약간 오른 나는 이 말을 F에게 해주면서 “그런 그가 분열된 존재인 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고 덧붙였다. “당신과 같군요…” F가 바로 말을 받았다. 그녀도 약간 취한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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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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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