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가극장 음악감독을 퇴임한 지 3년 남짓 지난 1911년 4월, 심장내막염 때문에 절망적인 상태였던 말러는 뉴욕에서 파리를 거쳐 빈으로 돌아갔다. 치료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은 ‘죽기 위해’ 빈으로 간 것이다.
말러 일행이 탄 열차가 빈에 다가가자 신문기자들이 올라타 시시각각 그의 병세를 전했다. 5월 12일 일행은 빈 서부역에 도착했고, 말러는 곧바로 요양원(sanatorium)으로 이송됐다. 신문에는 연일 병상의 상황을 전하는 센세이셔널한 보고들이 실렸고, 예전에 그를 쫓아냈던 사람들이 이젠 말러 시대의 뛰어난 오페라에 대한 추억들을 입에 올렸다.
5월 18일 한밤중에 말러는 “모차르투르”를 두 번 되뇐 뒤 숨을 거두었다. 어미의 ‘르’는 독일어에서 ‘축소사’(縮小?)라 불리는 것인데, 친밀감을 나타내려 호칭에 붙여 쓴다. 죽은 지 나흘 뒤인 5월 22일 말러는 장녀 마리아 안나가 잠든 그린칭 공동묘지Grinzinger Friedhof에 묻혔다. 입회인 파울 슈테판은 이렇게 썼다.
“주검은 거기(그린칭 교회당)서, 비가 몹시 쏟아지는 가운데 묘지로 옮겨졌다. 약 15분 뒤 도착과 동시에 아무 의례도 없이 관이 내려갔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수백 명이나 됐는데도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그치고 일곱 색깔 무지개가 빛나는 정적 속에 한 마리의 나이팅게일이 울었다. 흙덩이들이 던져졌고, 모든 것이 끝났다.”
쇤베르크는 <구스타프 말러의="" 매장="">이라는 제목을 단, 한 장의 그림을 남겼다. 거기에 묘사돼 있는 것은 바로 ‘고향 잃은 자’의 매장풍경이다. 살풍경한 언덕 무덤구덩이 주위에 몇 사람이 서 있다. 하늘은 폭풍이라도 몰려올 듯 불길한 형상이고 한 그루 나무가 강풍 속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건 마치 말러의 모습 같다. 100년 뒤인 지금 묘비 뒤엔 몇 그루의 침엽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어느 것이 쇤베르크가 그린 나무인지 알 길이 없다.
말러의 무덤과 등을 맞대고 있는 줄에 아내 알마Alma Mahler(1879~1964)의 무덤이 있다. 나보다 먼저 F가 그 무덤에 달려가 “예쁜 무덤이네”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예쁜 무덤’이었다. 게다가 주위의 묘들과는 다른 강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기, 우리도 이런 무덤을 만들어서 들어가요…” 하고 F가 꿈꾸는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짙은 녹색 철제 묘비에는 ‘알마 말러=베르펠’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Adolph Georg Gropius(1883~1969)와의 사이에서 난 딸 마농 그로피우스의 하얀 묘비가 서 있었다. 말하자면 그 한 장소에서 알마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세 남자의 성(姓)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세 사람 외에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음악가 쳄린스키, 화가 코코슈카Oskar Kokoschka(1886~1980) 등, 알마는 수많은 남자들과 연애를 했다. 그것은 알마라는 여성이 지닌 특별한 재주를 증명해준다.
알마는 풍경화가 에밀 야콥 신들러의 딸이다. 말러는 19살 연하에 음악적 소양이 깊은 이 재원(才媛)을 사랑해 1902년에 결혼했다. 자립심이 강한 알마에 대해 말러는 철저히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대했다. 예컨대 아직 결혼하기 전 말러는 연주여행지에서 열렬한 연애편지를 알마에게 보냈는데, 그에 대한 알마의 답장이 “일을 하러 가야 하니 오늘은 이만 씁니다”로 끝맺은 데 화가 나 장황하게 장문의 편지를 또 보냈다. 알마가 말하는 ‘일’이란 작곡 레슨을 가리키는데 말러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앞으로 그대에겐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단 한 가지 일밖에 없어!” 하고 말러는 단언했다. “그대는 무조건 내 것이 돼야 해. 그대의 장래 생활이나 모습을 그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내 욕구에 종속시키고 내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그 대가로 바래서는 안 돼!”
여기엔 노골적인 가부장적 지배욕과 더불어 말러의 굴절된 열등감이 스며 있다. 먼저 알마의 젊음과 교양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인종과 사회계층’에 얽힌 열등감이다. “보헤미아 태생의 유대인, 술집 자식이 빈 명가의 규수에게 한풀 꺾이는 건 당연했다. 다름 아닌 ‘빈 제일의 재원’과 결혼하려 했으니, 말러는 자신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뻗댈 수밖에 없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남성적’이어야만 했던 것이다.”(무라이 쇼村井翔 『말러』)
알마는 어떻게 했던가? 회상에 따르면, 하룻밤을 울며 새운 끝에 마음을 가라앉힌 뒤 말러가 그녀한테서 다짐받으려 했던 것을 서약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니까 말러의 무리한 요구를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받아들인 것이다. 말러가 ‘무리를 해서라도’ 과시한 부성(父性)과 남성성에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말러와 알마 모두 마음속에 분열을 품은 채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알마는 처음엔 작곡가로서의 말러의 재능을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1902년 6월 9일 독일 쾰른 근교의 소도시 크레펠트Krefeld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지휘로 진행된 제3교향곡 초연을 지켜봤을 때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홀로 남몰래 울고 또 웃었다. 돌연 내 첫 아이가 뱃속에서 꿈틀대는 걸 느꼈다. 나는 이 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말러의 위대성을 확신하기에 이르렀으므로 그날 밤 기쁨의 눈물로 목이 메어 그 확신을 그에게 전하고 헌신적인 사랑과 영원히 그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의를 다졌다.”(무라이의 책)
알마와 말러의 관계는 긴장을 잉태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말러 예술 탄생의 촉매가 됐다. 1910년 여름 말러는 남부 티롤의 토브라하라는 마을에 지은 작곡용 오두막 별장에 칩거하면서 교향곡 제9번을 완성했고, 교향곡 제10번 작곡에 착수했다. 당시 알마는 신경증 전지요양을 위해 그라츠Graz 근교의 토벨바트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사랑에 빠졌다. 이윽고 알마는 토브라하로 가서 말러와 합류했으나 그로피우스와의 연애편지 왕래는 계속됐고, 그중 한 통이 말러의 눈에 띄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연이 아니라 오히려 알마가 의도적으로 만든 사건이었던 걸로 추측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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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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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 >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 >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