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가 자란 보헤미아Bohemia 지방이나 모라비아Moravia 지방은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도 공업화된 지역이고 슬라브와 게르만,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세 문화가 뒤얽힌(交錯) 지역이었다. 이 땅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도로서의 종교적 의식은 희박했고 동화되는 추세가 강했다. 그들 중 다수는 전통적인 유대교 공동체로 살아가는 동유럽 유대인들을 멸시했다. 말러도 예외가 아니다. 그 자신도 ‘유대인’에 대한 ‘자기증오’라고나 할 굴절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말러는 15살 때 빈 악우협회(?友協?)음악원에 입학했다. 17살부터 빈대학에서 브루크너의 강의를 들었고 철학, 역사, 음악학 등을 공부했다. 그것은 바로 ‘자유파’라 불리는 사람들의 주도하에 자유주의개혁과 근대화가 추진되고 있던 시대의 일이다. 그러나 이 자유파는 기성 지배체제를 타도하진 못했으며, 오히려 일부 부유한 부르주아가 기성 지배체제와 타협해 지배층에 가담했다. 그 때문에 이 자유주의체제에 불만을 품고 좌익에서부터 반유대주의자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정치적 조류가 대두해 서로 뒤엉키는 혼돈스러운 상황이 조성됐다. 문화운동에서는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로 대표되는 ‘분리파’가 이런 자유파체제에 대한 투쟁에 앞장섰다.
말러는 학창시절 범게르만주의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들은 쇼펜하워Arthur Schopenhauer(1788~1860),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 바그너로부터 강한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와타나베 히로시渡?裕에 따르면, 이들 사상의 공통점은 “인간 이성의 배후에 펼쳐져 있는 무의식 영역에 주목하면서 오히려 그쪽이 인간에게 더 본질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근대 계몽주의 사상에 대해, 그런 얼핏 명료해 뵈는 ‘빛’의 부분은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의 본질은 합리적 정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들은 자유파가 표방하는 계몽주의에 속임수가 감춰져 있다는 걸 간파하고 게르만 민족의 힘으로 그 속임수를 타파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서 음악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성이 포착할 수 없는 것에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음악이라고 이들 사상가는 주장했던 것이다.(와타나베 히로시 <말러와 세기말 빈>)
말러와 프로이트는 계몽주의 덕에 신분해방을 이룬 동화(同化) 유대인들이다. 그 말러가 범게르만주의에 공감하고 계몽적 이성 저 안쪽 깊은 곳에 다가가는 음악이라는 예술에 자신을 바친 것이다. 그러나 1895년 무렵이 되면 카를 뤼거Karl Lueger(1844~1910)가 이끄는 반유대주의 정당이 빈곤층과 보수층의 지지를 끌어모아 대두하게 된다. 뤼거는 나중에 빈 시장이 돼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게 된다. 히틀러는 뤼거의 연설을 듣고 큰 감화를 받았다. 예전의 동지들 속에서 반유대주의운동 리더가 출현하자 “말러는 유대인이기에 의지할 곳 없는 처지”를 맛보게 된다.(앞서 말한 와타나베의 책)
말러는 평생 자신의 출신 때문에 반유대주의로부터 위협받고 배척당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강박관념’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사후에 나치스에 의해 현실이 됐던 것이다.
말러는 분열된 존재다. 그 분열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근대라는 시대 그 자체의 분열상을 충실히 체현한 것이다. 그러나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지만, 이런 분열을 온몸으로 껴안고 시대를 체현하는 것도 특별한 재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역시 천재라 불러 마땅한 존재다.
“유대인은 ‘짧은 팔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말러의 입버릇이었다. 즉 유대인이 남에게 뒤지지 않는 성과를 올리려면 그들의 몇 배나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1885~1973)
팔이 짧고 키도 작았던 말러는 37살의 젊은 나이에 빈 궁정가극장 음악감독이라는 정점에 올라섰다. 그때 유대교도라는 점이 고용계약에 장애가 되자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1907년 ‘운명의 타격’이라 불리는 일련의 사건이 말러를 덮쳤다. 제1 타격은 궁정가극장과의 이별, 제2 타격은 장녀 마리아 안나의 병사, 그리고 제3 타격은 나중에 그의 목숨을 빼앗게 되는 심장병 발작이다.
그해 1월, 말러가 자작곡을 지휘하며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등을 돌아다니고 있을 동안 빈에서 추방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 내용은 말러가 종종 빈을 비워두고 있다는 것, 그에 따른 연주 수준의 저하, 그리고 레퍼토리의 편향 등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졌다. 격화되는 반말러 캠페인에 대해 그해 5월에는 저명인들의 말러 옹호 성명이 발표됐다. 서명한 사람은 부르크 극장Burgtheater 감독을 지낸 막스 부르크하르트, 나중에 그의 묘비를 제작한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Franz Maria Hoffmann(1870~1956),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었다.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1874~ 1929), 비평가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1862~1931), 작곡가 아르노르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1874~1951), 정신분석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 등 유대계 지식인 다수가 서명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반말러 캠페인을 반유대주의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옹호파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말러의 퇴임은 이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돼가고 있었다.
12월 9일 말러는 마침내 빈을 떠났다. 그날 궁정가극장 게시판에는 “싸움의 와중에 또는 일시적 흥분 속에 상처를 입고, 과오를 범한 것은 여러분이나 내게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사퇴의 변과 고별인사가 게시됐으나 이것도 곧 누군가에 의해 찢겨졌다.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지휘자에 취임하기 위해 뉴욕 여행길에 오르는 말러를 빈 서부역에서 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환송했다. 그중에는 쇤베르크,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1871~1942), 베르크Alban Maria Johannes Berg(1885~1935), 베베른Anton von Webern(1883~1945), 클림트, 브루노 발터Bruno Walter(1876~1962), 아르노르트 로제Arnold Josef Rosé(1863~1946) 등의 얼굴도 있었다. 그들 다수는 나중에 이때의 말러와 마찬가지로 나치스에 쫓겨 빈을 떠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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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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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