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빈에서 베를린으로 날아가 사흘 머문 뒤 5일 빈으로 돌아왔다. 그날 돌아온 것은 슈타츠 오퍼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를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다소 기대 밖이었다. 결국 이번 빈 체류 중 슈타츠 오퍼에서 공연 셋, 폴크스 오퍼에서 공연 둘을 봤으나 만족스러웠던 건 <박쥐>뿐이었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명문 오페라 극장이라곤 하나 늘 최고수준의 상연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됐다. 말러가 지휘하던 시절은 어떠했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지만 그가 지휘하는 <돈 조반니>나 <피델리오>를 들어보고 싶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는 1897년에서 1907년까지 10년간 슈타츠 오퍼의 전신인 빈 궁정가극장 예술감독으로 있었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가극장 로비에는 오귀스트 로댕이 제작한 그의 브론즈 흉상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본래 흉상은 나치스 손에 파괴당했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은 전쟁 뒤 세운 복제품이다. 나치스 시절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1791~1864), 멘델스존Mendelssohn, 말러는 ‘유대계 3M’으로, 연주를 금지당했다. 그 대신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1813~83)가 신성시되고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1824~96)도 게르만정신을 보여주는 음악으로 권장됐다.
1월 6일 아침 나와 F는 마음먹은 김에 말러의 무덤으로 향했다. 창 밖은 변함없이 온통 얼어붙은 듯 추웠다. 이날은 ‘삼성왕절Heilige Drei Koenige’(동방박사 세 명이 어린 예수를 보러 베들레헴을 찾아갔다는 날)이라는 가톨릭 축일이어서 대부분의 상점들이 셔터를 내렸고 길거리 행인들 왕래도 뜸했다. 노면전차 1번을 타고 쇼텐토아Schottentor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38번으로 갈아타고 종점인 그린칭Grinzing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묘지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와, 브뤼겔 같네…”하고 F가 환성을 질렀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묘지 경관이 미술사미술관에 걸려 있는 풍경화 <눈 속의 사냥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묘지에서는 방문자를 위해 알기 쉬운 장소에 저명인 묘의 위치를 표시해 둔 지도가 게시돼 있는 법이다. 따라서 말러 정도면 무덤을 찾아내기 어렵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문을 지나 왼쪽에 있는 안내판에 그 이름은 없었다. 섣달그믐에 찾았던 중앙묘지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넓은 묘지다. 그런데, 어떻게 찾아낸다?
생각 끝에 때마침 지나가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부부를 불러 세웠다. “말러의 무덤을 찾고 있습니다만, 알고 계신지요?”하고 물었더니 “말러라니요?”하고 되받았다. 내 발음이 나쁜가 보다 생각하고, 갖고 있던 히라타 다쓰지 선생의 책 <중유럽 묘비 순회여행>을 펴서 “이것 말이오”하고 무덤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남편 쪽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돌려주면서 “미안합니다. 나는 중국어와 일본어만 읽지 못해요. 다른 언어라면 할 수 있겠는데”하고 말했다. 별 재미없는 농담이었지만 그걸로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구스타프 말러예요. 유명한 음악가…”라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의 무덤을 보러 일부러 왔어요? 좋아, 찾아드리지요”하고 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좀 구부러진 곳에 또 하나의 안내판이 있었다. 거기에는 알파벳 순으로 저명인 무덤 위치가 명시돼 있었다. 말러는 제6지구 제8열에 있었다. “내 부모님 묘소 바로 옆이군. 늘 다니던 곳인데 전혀 몰랐어”라고 사람좋아보이는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앞장서서 안내하려는 그에게 “됐소, 이젠 알았으니까”하고 고맙다는 말을 한 뒤 통로에 쌓인 눈을 밟으며 제6지구로 향했다.
이윽고 “아, 있다!”하고 F가 소리높이 외쳤다. 기다란 사각형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요제프 호프만이 제작한 말러의 묘비는 넓적한 석주 위쪽에 굵은 글씨로 ‘구스타프 말러’라는 이름만 새겨 놓았다. “상큼하게 지휘대에 올라선 말러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단정한 묘비”라는 히라타 다쓰지 선생의 형용 그대로였다.
주변에 줄지어 서 있는 묘비들은 아무래도 가톨릭계 상류층 시민의 것인 듯 천사와 십자가 등 갖가지 조각으로 장식돼 있는 데 비해 말러의 묘비에는 이름 외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 무덤을 찾아줄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고, 찾지 않을 사람들에겐 알려줄 필요가 없을 테니까”라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건 아마 사실일 테지만, 말러 자신이 의식하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가 유대인 출신임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각인(刻印)을 거기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대교의 전통적 교의는 우상숭배를 금하고 구상적(具象的)인 형상을 묘사하는 것도 금하고 있다. 그 탓인지 이제까지 내가 돌아다니며 본 체험에 근거한 것이지만, 유대인 묘는 기독교도의 그것과는 달리 모두 매우 간소한 것이었다. 파울 첼란이 그랬고 프리모 레비도 그랬다.
말러는 1860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령이었던 보헤미아 지방의 카리슈트라는 마을에서 증류주 장사를 하는 상인의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계몽사상의 보급과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유럽 각지에서 서서히 유대인의 신분 해방이 이뤄졌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848년 혁명과 그 좌절을 거쳐 유대인의 사회적 진출이 현저해졌다. 말러가 태어난 1860년 바로 그 해에 제국 내의 비독일계 민족들의 권리확대를 인정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10월 칙령이 반포됐다. 유대인에게도 처음으로 이동의 자유가 허용됐고 수도 빈의 유대인 인구가 급증했다. 부유한 유대인은 신문사나 백화점을 경영하고, 의사나 변호사가 됐다. 중류 유대인들은 상류로의 계층 상승을 목표로 자식들에게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말러의 아버지는 그런 계층에 속했다. 이런 유대인 지위 상승에 대한 반감과 동유럽, 러시아에서 유입돼온 가난한 유대인에 대한 경멸이 뒤섞여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온상이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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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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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