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트리지의 작품 중에 그림자그림 연극 형식이라 할까, 소박한 목조 소형무대를 만들어 거기에 그림자그림 인형을 움직이게 하거나 영상을 투사하는 것이 있다. 이번에 전시돼 있던 것 중 하나는 <블랙 박스 Black Box>다. 이 작품은 실은 2005년 가을 베를린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본 것이었다.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당시 나는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에 그 얘기를 썼다. (‘심야통신’14/베를린의 가을)
“(켄트리지의) 지속적인 주제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와 그 이후 시대가 인간에게 남긴 트라우마trauma(심리적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다시 옛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의 독일 식민지주의 기억을 다루고 있다. 동서독 통일을 실현하고 유럽연합EU의 중심에서 발전을 구가하는 지금의 독일, 그 번영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베를린 중심가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의 미술관에서 바로 ‘블랙 박스’에 감춰져 있던 식민지주의의 악몽을 되살려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 켄트리지가 남아프리카 태생 백인이라는 점이다. 즉 그는 말하자면 식민지주의의 가해자이고 수혜자였던 쪽에 속하는 존재인 것이다. (…) 과연 일본에서 이처럼 자국이 가해자인 식민지주의 기억을 다룰 일본인 아티스트가 존재할까?”
‘블랙 박스’라는 건 은폐된 기억이라는 함의를 지닐 것이다. 거듭 영사되는 백인 사냥꾼이 커다란 코뿔소를 사살하는 영상은 바로 식민지주의의 우화다. 1904년 1월 독일의 침공에 저항해 봉기했던 남서아프리카 원주민 헤레로족Herero과 나마쿠아족Namaqua은 불모의 사막으로 내쫓겨 굶주림과 갈증 속에 죽어갔다. 헤레로족은 전 인구의 80%에 달하는 약 6만 명, 나마쿠아족은 전 인구의 50%에 해당하는 1만 명이 학살당했다. (유튜브에서 <블랙 박스> 보기)
이 헤레로 나마쿠아 학살Herero and Namaqua Genocide은 20세기 최초의 대량학살사건인데, 현재 이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독일국민은 많지 않다. 그것을 생각하면 남아프리카 식민자의 자손인 켄트리지가 독일 수도에서 이 전시회를 연다는 행위가 지닌 높은 예술성과 정치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켄트리지의 예술은 항상 풍성한 유희성遊?性을 드러내면서도 몹시 우울한melancholic 시정詩情이 넘친다. 많은 현대 아트가 현실에 등을 돌리고 다행증Euphoria에 탐닉하고 있는 때에 그만은 어두운 구덩이의 바닥을 살피듯 현대라는 시대의 우수憂愁, 포스트 콜로니얼과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우수를 응시하고 있다.
<블랙 박스>를 베를린에서 본 지 5년 뒤 마침내 일본에서 대규모 켄트리지 개인전이 열렸으나 기대했던 <블랙 박스>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전시되지 않았다. 도록에 담긴 해설에는 (내 나름대로 요약하면)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가와모토 신지)
“일본이라는 곳에서 거리를 두고 보면 지금까지 구미의 켄트리지에 관한 비평 언설에선 ‘어떤 편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수렴된다. ‘유럽 식민지주의 부(負)의 유산, 그 최후의 잔재인 남아프리카 인종격리정책 상황 속에서 차별자 쪽에서 태어났지만 피차별자 쪽에 깊이 공감하며 용감하게 체제를 비판한 한 사람의 백인 미술가의 양심 이야기’다. 이 ‘명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유럽 역사가 범한 ‘죄’에 대한, 그들의 양심회복을 위한 알리바이로서의 역할을 켄트리지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 필자의 기술에 나는 반은 동의하면서도 반은 강한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주의의 유산’을 주제화한 켄트리지의 작품이 일부 유럽인의 ‘알리바이’에 동원되고 있다는 지적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 다수는 애당초 스스로의 ‘부의 유산’에 눈을 감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일본이라는 곳에서 거리를 두고 백인의 ‘편향’이나 ‘알리바이’를 왈가왈부하는 것을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물론 이 필자는 ‘명예 백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일본인과 일본정부가 남아프리카 구체제를 지원해온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부언해 놓고는 있다. 하지만 일본 자신이 홋카이도, 오키나와, 타이완,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자행한 식민지지배와 학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잊어버린 걸까? <블랙 박스>를 보고 일본인이 상기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같은 도록에 켄트리지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백인 죄책감White guilt이여 돌아오라. 백인 죄책감은 꽤나 비난받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도 특히 뚜렷한 (죄책감의) 특징은 이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가끔 한 방울씩 복용하는 작은 병 속의 약이고 그 효력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알베르티나에 전시돼 있던 또 하나의 그림자그림 연극 작품은 <마술 피리>다.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단색monochrome의 추상적 영상이 끊임없이 흐른다. 그 영상을 타고 우주의 저편에서 날아오듯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낮게 들려온다. 벽에 걸린 해설문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켄트리지는 밤의 여왕과 사라스트로의 대립을 계몽주의의 양면성으로 파악했다. 계몽주의는 인간해방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억압과 복속을 불러왔다. <블랙 박스>는 그 계몽주의의 어두운 면暗?面으로서의 식민지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다.”
<마술 피리>의 줄거리는 선인(밤의 여왕)과 악인(사라스트로)의 입장이 느닷없이 뒤바뀌는 등 몹시 자기모순적이고 양면적이다. 위에서 얘기한 켄트리지의 해석은 바로 그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다운 해석이라 할 수 있다. 2005년에 브뤼셀 모네 극장 오페라 <마술 피리>의 미술을 맡은 켄트리지가 그 구상 과정에서 이 영상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마술 피리>에 대해선 이젠 알 것 같은 기분이 된 나지만 이 모네 극장판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직도 <마술 피리>에서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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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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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