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 피리魔笛>를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봤다. 맨 처음은 30년쯤 전에 본 잉그마르 베르히만Ernst Ingmar Bergman(1918~2007) 감독의 스웨덴 영화였는데, 그때는 <마술 피리>보다는 베르히만에 흥미가 있었다. 실황공연을 처음 본 것은 1996년 베를린 주립 가극장州立 歌劇場에서였다. 벗들과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적을 찾아가기 전에 베를린에서 며칠 보냈을 때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선 2002년과 2006년 두 차례, 그리고 도쿄에서도 본 적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2002년 잘츠부르크에서 본 것이다. (지난 회 참조)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1934~ )의 연출은 서커스 무대처럼 스펙터클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사라스트로 역의 르네 파페René Pape(1964~ ), 파미나 역의 바버라 보니Barbara Bonney(1956~ )는 그렇다 치고, 밤의 여왕 역의 디아나 담라우Diana Damrau(1971~ ), 파파게노 역의 사이먼 킨리사이드Simon Keenlyside(1959~ ) 두 사람은 지금만큼 유명하진 않았다. 특히 킨리사이드는 자전거를 타거나 거꾸로 서기를 하면서 대열연을 펼쳤다. 가수들에게 과도한 동작을 하게 해 음악이 망가졌다는 비평이 있었다고 들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이렇듯 나는 <마술 피리>에 대해선 이젠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 빈 체류 중에도 늘 그랬듯이 미술관에 갔다. 우리는 미술사 미술관에서 브뤼헐(브뤼겔), 카라바조, 루벤스 등 옛날 거장들과 몇 번째인가의 재회를 즐겼으나, 그밖에 현대미술관MOMA이나 레오폴드Leopold 미술관, 그리고 F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알베르티나Albertina 미술관에도 갔다. 거기에선 피카소, 미켈란젤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1954~ ) 전시회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F의 최대 표적은 켄트리지였다.
도착 다음 날 우리는 시차 때문에 나른해진 몸을 왕궁 인근의 알베르티나로 끌고 갔다. 엄청 북적댔지만 대다수는 피카소와 미켈란젤로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던 듯 켄트리지 전시회는 비교적 한산했다.
맨 먼저 들어간 전시실에서는 역회전 촬영을 교묘하게 활용한 영상작품이 사방의 벽을 비추고 있었다. F는 중앙 벤치에 앉아 마치 초등학생처럼 빠져들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방은 그 뒤 몇 개나 이어질 전시실의 첫 번째 방이었으므로 그처럼 느릿느릿 봤다가는 폐관시간까지 도무지 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F는 그런 걱정은 간단히 날려보내버릴 수 있는 의식의 소유자다. ‘계획성’이나 ‘시간’이라는 근대의 규율의식에 속속들이 속박돼버린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F를 흉내 낼 수 없다.
우리가 처음 켄트리지의 작품을 본 것은 2000년 광주 비엔날레에서였다. 그때 본 드로잉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에 계속 집착하는 듯한, 현대미술의 경향에 역행하는 기묘할 정도로 향수 어린 세계였고, 가슴을 죄어오는 듯한 애수를 띠고 있었다. 이건 뭐지,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우리는 금세 빨려 들어갔다. 그 뒤 카셀Kassel의 도쿠멘타 국제미술전, 도쿄의 모리미술관, 프랑크푸르트와 뒤셀도르프의 현대미술관,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서 켄트리지의 작품에 주목해왔다. 2010년에는 도쿄에서 본격적인 개인전이 열려,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보러 갔는데, F는 여러 사정으로 가 보지 못했다. 따라서 이번 빈 전시회는 F에겐 도쿄에서 보지 못했던 작품을 볼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의 예술에 대해, 일본에서 열린 개인전 도록을 인용해서 소개한다.
“윌리엄 켄트리지(195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요하네스버그에 거주)는 1980년대 말부터 ‘움직이는 드로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필름을 제작해 왔습니다. (…) 켄트리지의 영상작품에는 남아프리카의 역사와 현대의 사회상황이 짙게 반영돼 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차별정책) 문제를 자신의 아픔으로 얘기하는 그의 초기작품은 탈서구중심주의를 호소하는 포스트 콜로니얼postcolonial(식민지 이후) 비평과 공명하는 뛰어난 예술적 실천으로서 (…)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품이 좀 더 보편적인 뭔가를, 비호와 억압의 양면성, 분단 당한 자신과 그 재통합의 불가능성 등 근대인들이 직면해온 보편적인 문제를 집요하게 검증하며 이야기를 계속해온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알베르티나에서는 초기의 ‘움직이는 드로잉’ 작품 외에 몇 점의 영상작품과 그림자그림 연극 형식의 설치미술installation 작품 등이 전시돼 있었다. 영상작품 <코>는 켄트리지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쇼스타코비치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1906~75)의 오페라 <코>의 연출을 의뢰받았을 때 그 구상을 짜다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고골Nikolai Vasil'evich Gogol(1809~52)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작곡된 쇼스타코비치의 첫 오페라다. 1930년에 초연된 뒤 오랫동안 소련의 극장 레퍼토리에서 제외돼 있던 것이다.
켄트리지의 예술에서는 음악이 특별한 효과를 낸다. <코>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실사 영상과 그 음악을 절묘하게 활용한다. 격렬한 리듬의 피아노곡은 어느 사이엔가 남아프리카 음악과 융합돼 간다. 또 이 아프리카 음악은 밝고 역동적이라는 일반적 선입관과는 달리 조용하고 한없는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대한 오마주이며, 매우 세련된 장송곡이다.
예상대로 그날은 켄트리지전의 반도 보지 못했는데 시간이 다 지나 폐관시간이 되고 말았고, 몹시 허전해진 F는 꼭 다시 한 번 보러오겠노라 다짐했다. 그리하여 일본에 돌아오기 이틀 전인 1월 6일 다시 알베르티나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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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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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