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12월 5일 오전 1시 5분. 모차르트는 35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하, 히라타 선생의 서술을 참고해서 장례와 매장 광경을 소개한다.
대음악가 모차르트도 귀족 등에 비하면 생전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고, 아내 콘스탄체의 낭비벽도 있어서 생활은 어려웠다. 1791년 가을 가극 <마술 피리>를 작곡하고 있던 모차르트는 몹시 건강을 해쳐 익명으로 <레퀴엠> 작곡을 의뢰하러 온 귀족의 심부름꾼을 저 세상에서 온 죽음의 사자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장례는 슈테판 대성당 십자가 예배당에서 치러졌으나 그의 처는 세 등급의 장례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인 3등급을 택했고, 게다가 그 비용마저도 친구한테서 빌려야 했다. 장례식에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 참석했는데, 처는 거기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주검은 조잡한 마대자루에 싸여 대여받은 관 속에 뉘였고, 짐마차에 실려 시외로 향했다. 원래 얼마 되지 않았던 조문객들은 도시 성문에서 되돌아갔고, 거기서부터는 짐마차만 약 5㎞의 거리를 달려 장크트 마르크스로 갔다. 그곳 공동묘 구덩이에서 관 아랫부분이 열리면서 마대자루에 든 주검만 아래로 떨어졌다.
처 콘스탄체는 남편 사후 17년이 되는 해에야 처음으로 그곳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주검도 매장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당시 공동묘 구덩이에는 8구 이상의 주검이 한꺼번에 묻혔고, 10년이 지나면 파낸 뒤 다시 그 구덩이를 매장지로 썼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명성이 그의 사후 높아지자 그 묘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사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공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1855년 주검을 파묻었던 장소가 특정되고 그곳에 빈 시의 의뢰로 근사한 묘비가 세워졌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나 사후 100년이 됐을 때 그 묘비는 교외에 새로 조성된 ‘중앙묘지’의 명예묘지지구로 옮겨졌다. 또 나중에 발굴돼 모차르트의 것으로 간주된 두개골은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박물관에 인도됐다.
장크트 마르크스 묘지 문을 들어서면 방문자를 위한 안내판이 있고 거기에 모차르트의 주검을 던져 넣었던 구덩이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걸어가 보니 약간 널찍한 땅에 흰 돌기둥(石柱)과 천사를 새긴 조각이 놓여 있었다. 돌기둥도 천사도 모차르트의 묘비가 중앙묘지로 옮겨진 뒤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묘지기가 폐물을 이용해 세운 것이다. 조잡한 묘비 앞에는 방문자가 바친 듯한 잔돈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중에는 일본 10엔짜리 동전도 있었다. 아마 이 추위에도 일본사람 누군가가 왔다간 모양이었다.
나는 이럴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망자의 소리가 들려오지나 않을까 귀를 기울인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그 대신 멀리서 아련하게 부르는 것 같은 어떤 귀에 익은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쾨헬번호 622 Clarinet Concerto In A Major, K. 622>였다. 다른 어떤 곡보다 그 장소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이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1791년 10월, 즉 죽기 2개월 전에 완성된 것이다. 벗이자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안톤 슈타들러를 위해 씌어졌다. 작곡가는 이미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기 높은 곡이어서 여러 가지 녹음이 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자비네 마이어Sabine Meyer가 당시의 악기 바세트호른Bassetthorn을 연주하고, 클라우디오 압바도Claudio Abbado(1933~ )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니가 연주한 것이다.(EMI TOCE-14323)
군더더기 없는 명석한 연주다.
음악평론가 요시다 히데카즈吉田秀和는 이렇게 썼다. “이토록 쓰리고, 그래서 투명한 곡은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음악을 몇 번이나 듣는 건 내 취미는 아니다.” “그것은 너무 차분(平?)해서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듣는 이한테서 자아내고야 만다. 특히 이것이 밝은 장조의 빛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만큼 단조 때보다도 통절함은 더 전면적이다.”(「클라리넷 협주곡」, 『모차르트를 찾아서』(하쿠스이샤白水社))
더 덧붙여야 할 말을 나는 모르겠다.
잘 알려진 제2악장 아다지오adagio가 투명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이미 곡의 첫머리(冒頭), 경쾌하게 질주하는 제1악장 알레그로allegro 속에서 하늘 한편에서 비쳐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미 슬픔이나 기쁨 따위보다 오히려 슬픔과 기쁨의 경계조차 사라져버린 듯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감정, 이 세상 저 너머에서 오는 감정이다.
한 인간이 죽음을 몇 주 앞두고 이런 음악을 만들었다는 건 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니,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에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천상의 음을(바란다면, 지하의 음도) 듣고 재현하는 것이 음악이 아닌가. 즉 음악이란 저 세상의 소리를 듣는 일인 것이다.
어릴 적부터 떠돌이광대처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고, 살아서는 그 재능에 훨씬 못 미치는 자그마한 명성밖에 얻지 못한 채 병고와 빈궁 속에 죽은 모차르트. 다시 요시다 히데카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차르트는 “자신도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공허한 느낌. 도무지 치유하기 어렵고, 나날이 커져만 가는 뭔가에 대한 동경을 품은 채, 다만 이제 산적한 빚에 쫓겨 닥치는 대로 일을 계속하기 위해 앉아 있는 생활” 속에서 이 클라리넷 협주곡을 작곡했다. “무심한 황홀” 속에서 “모든 목적의식에서 해방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위해 작곡한 것이 아니다. 아니, 작곡한 것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바로 그가 음악인 것이다. 그 자신이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음악이라는 불가사의 그 자체를 체현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죽음의 신(死神)과의 약속을 이행하기라도 하려는 듯 최후의 순간까지 <레퀴엠>을 완성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베갯머리에 선 제자에게 다시 한 번 <마술 피리>를 보고 싶다고 얘기하고는, 유쾌한 <새 사냥꾼의 노래>를 들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름 없는 가난한 이들의 주검과 함께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 구덩이 흔적 앞에 우두커니 서서 추위에 떨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무덤은 필요 없지만 이런 구덩이에 내던져지는 거라면 나쁘진 않을 거야… 곁에 서 있던 F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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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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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