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유럽에는 온통 매서운 한파가 몰아쳤다. 빈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른 아침에는 영하 7, 8도까지 내려가는 추위였다. 그럴 때면 나는 따뜻한 방 안에 꼼짝 않고 들어앉아 있는 인간이지만 F는 다르다. 돌아다니고 싶어 근질근질한 듯했다. 섣달 그믐날 아침 F가 끌고 가듯이 해서 우리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1797~1828),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등 빈과 인연이 있는 음악가들 묘소를 둘러보러 갔다.
나는 예전부터 여행지의 묘지를 찾아가는 습관이 있었다. 좋은 취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거기서 만난 적도 없는 과거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도 있고 놀랄 만큼 수다스러운 고인도 있다. 지금까지 찾아본 외국 묘지를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본다면, 런던 하이게이트Highgate 묘지로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1883) 묘를 찾아간 것이 시작이었는데, 파리에서는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의 사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1908~1986), 하임 수친Haim Sutin(Chaim Soutine, 1893~1943) 등, 페르라세즈 묘지의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 등, 그리고 파울 첼란Paul Celan(1920~1970)의 묘를 찾아 티에Thiais 묘지에도 갔다.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1867~1945)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1919) 묘를 보기 위해 동베를린에 있던 묘지를 찾아간 적도 있다. 토리노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1919~1987)의 묘를 찾았다. 잘츠부르크에 체류할 때도 꼭 한 번은 축제 대극장 인근 장크트 페터Sankt Peter 묘지를 거닐었다.
그럴 때 대부분 F와 동행했다. 어느덧 죽음이나 무덤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공통 취미가 됐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항상 의견이 일치하는 건 아니다. F는 우리에겐 어떤 무덤이 어울릴지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우리에겐 무덤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빈에서는 이제까지 묘지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지나치게 관광지화한 이미지 때문에 썩 내키지 않았다. 따라서 관광객이라곤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은 한겨울이었기에 오히려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출발 전에 히라타 다쓰지(平田達治)라는 사람이 쓴 『중유럽 묘비(墓標) 순회 여행』이란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1934년생인 독일 문학 연구자가 글자 그대로 중유럽 각지의 묘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그 내력을 면밀히 조사해서 역사와 문화를 종횡으로 엮어낸 책이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부었겠는가. 간편한 책이지만, 정말 대단한 책이다.
고대 로마군 주둔지였던 시대부터 2000년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가운데 600년 이상 합스부르크Habsburg 제국 수도였던 고도 빈의 지하에는 ‘망자(死者)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히라타 선생은 써 놓았다. 시 중심에 있는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 주위에는 예전에 교회묘지가 조성돼 있었으나 그게 18세기 초반에 폐쇄됨에 따라 지하묘지 수요가 늘어 슈테판 대성당 지하에만 1720년부터 60년간 2만 수천 명이 매장됐다. 18세기 후반에 계몽군주 요제프 2세Joseph II(1741~1790)의 명에 따라 위생적인 이유로 성벽 내의 시가지와 바깥 방어벽 내에 있는 묘지는 폐쇄되고 새로운 묘지가 방어벽 바깥에 건설됐으며, 또한 기왕의 지하묘지는 그대로 봉쇄됐다. 슈테판 대성당 지하에는 지금도 주검 인골들이 수북이 쌓여 있으며 관광객도 그것을 참관할 수 있다.
‘망자의 바다’ 위에 쌓아올린 화려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밤마다 ‘망각은 인생의 행복’이라며 웃고들 있는 것이다.
섣달 그믐날 아침 추위에 대비한 몸단장을 하고 문밖에 나서니 주변 경치가 희뿌옇게 보였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가로수는 하얗게 얼음을 덮어쓰고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마치 저 세상 광경 같았다.
숙소 근처에서 노면전차를 타고 가다 장크트 마르크스Sankt Marx라는 정거장에서 내렸다. 예전엔 궁벽한 시외였으나 지금은 자동차 판매점, 실업학교, 주택단지 등이 늘어서 있는 살풍경한 곳이다. 거기서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눈은 그쳤으나 길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나와 F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몇 분 걸어갔는데 길 저쪽에서 마차가 나타났다. 먼 과거 또는 저 세상(冥界)에서 나타난 듯했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검은 말이 흰 연기처럼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부도 검은 망토를 전신에 감고 있었다.
아, 모차르트… 묘한 느낌에 나는 사로잡혔다. 이 마차는 지금 묘지까지 모차르트의 관을 실어다 놓고 돌아오는 게 아닐까.
얼어붙은 길을 좀 더 걸어가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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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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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