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잘츠부르크 체류 중에 벗인 음악애호가 야마시나(山科)씨 부부에게 부탁해서 바드 이슐로의 잠깐여행에 동행했다. 버스로 편도 1시간 반 정도의 여행이었다.
험준한 산들과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의 온천지 바드 이슐은 19세기부터 오스트리아와 독일 상류계급을 위한 고급 휴양지였다. 시내를 관통하는 개울에선 맑은 물이 빠르게 흘러가고 그 언저리에 레하르가 살았던 대저택이 지금은 박물관이 돼 남아 있다. 이 땅에 오래 살았던 레하르를 기념해 매년 여름 오페레타 중심의 곡목으로 음악제가 여기서 열리고 있다. 야마시나 부부는 지난해에도 그 음악제에서 오페레타를 즐겼다.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가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때는 레하르 작품 상연일과는 일정이 맞지 않아 우리는 칼만의 <차르다슈 여왕 Die Csárdásfürstin>을 봤다. 대도시의 유명 가극장과는 달리 지방순회공연을 하는 대중연예와 같은, 자못 휴양지에 어울리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노래와 춤이 서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상 이상으로 능숙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오락에 충실한 것이었다. 통상의 오페라 공연에서라면 볼 수 없는 정경이어서 좀 놀랐지만 청중들은 여기저기서 무대 위의 음악에 맞춰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도 나름 즐거웠으나 몹시 피곤해져서 휴식시간에 빠져나와 하늘 가득 별이 빛나는 밤길을 걸어 먼저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호텔 프런트에서 빌라 슈라트Villa Schratt라는 곳을 찾아봤다. 만약 가까운 곳이라면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다소 불편한 곳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단념했다. 빌라 슈라트라는 곳은 작사가 뢰너 베다가 살았던 산장인데, 지금은 다른 사람 소유로 돼 있다.
그 며칠 전 나는 잘츠부르크 시내의 서점에서 책 표지가 보이도록 진열돼 있던, 몹시 흥미로운 책 한 권을 샀다. 『모차르트 쿠겔의 그늘에서 Im Schatten Der Mozartkugel』라는 제목이다. 모차르트 쿠겔이란 모차르트의 초상화로 장식한 자그마한 구형의 초콜릿이다. 잘츠부르크 특산품점과 슈퍼 어디에서나 팔고 있다. 관광객에겐 가장 간편한 선물용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그마한 초콜릿 그늘에 도대체 무엇이 있다는 건가?
그것은 사진이 많이 실려 있는 일종의 가이드북인데, 나치 시대의 잘츠부르크 기억을 지금에 되살려 잊어버리지 말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책이다. 잘츠부르크와 그 근교의 61개 장소를 골라 그곳들과 나치즘의 관계를 사진을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편리한 지도와 교통안내도 들어 있어 원한다면 누구나 그곳에 가볼 수 있도록 편집돼 있다. 3명의 공저자는 모두 1960년대에 태어난 그 지방 출신자들이다.
표지 사진은 SS(Schutzstaffel, 나치스 친위대) 최고사령관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1900~1945)가 1938년 3월 22일(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열흘 뒤) 잘츠부르크를 방문했을 때의 것으로, 배경의 산봉우리에 호엔잘츠부르크성Festung Hohensalzburg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사진1)
모차르테움의 대형 홀은 여름 음악제치고는 수준 높은 가곡의 밤 실내악이 연주되는 곳인데, 이 책을 펼치면 거기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 모습을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사진2) 정면에는 나치당의 심볼인 쌍머리 독수리가 내걸렸고 벽에는 커다란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갈고리십자) 휘장이 걸려 있다. 나는 지금까지 경험해본 음악홀 중에서 음향 좋고 편안한 이 홀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이 사진을 본 뒤에는 마음껏 음악에 도취하려는 순간, 좀 기다려, 하고 나 자신을 불러세우는 심리가 발동하게 됐다.
요컨대 이 책은 모차르트쿠겔로 상징되는 현재의 잘츠부르크의 상업적 번영의 그늘에 어두운 폭력의 기억이 감춰져 있다는 걸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음악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양으로 찾아간 관광객은 찜찜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책을 만든 목적이다.
이 책에 프리츠 뢰너 베다와 인연이 있는 장소로 바드 이슐 근교의 빌라 슈라트가 실려 있다.(사진2 오른쪽) 그 항목에는 이런 게 씌어져 있다. “바드 이슐은 레하르 박물관과 레하르 극장을 끼고 있는 휴양지지만, 그 대본 작가가 존재하지 않는 기념도시다. 작가 프리츠 뢰너 베다는 1930년대까지 이 장르의 스타였다. 그는 레하르를 위해 유명한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 대본을 썼다.”
1883년에 보헤미아 지방에서 태어난 뢰너 베다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빈에서 많은 히트송을 작사했다. 1932년에 바드 이슐의 슈라트 빌라를 구입해 거기서 여름을 보냈다. 하지만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뒤 곧 그는 게슈타포Gestapo에 체포돼 최초의 ‘저명인 이송Prominententransport’으로 다하우Dachau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리고 9월에 부헨발트Buchenwald 수용소로 옮겨져 거기에 감금돼 있던 빈 출신 작곡가 헤르만 레오폴디Hermann Leopoldi(1888~1959)와 함께 <부헨발트의 노래 Buchenwaldlied>를 썼다.
오, 부헨발트, 우리는 한탄하지 않는다
너는 우리의 운명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인생에게 예 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날은 올 것이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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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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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