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2011년 연말연시를 빈에서 보냈다. 1월 4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특별강의를 하게 돼 빈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바람에 베를린행을 전후해서 열흘 정도를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내가 빈을 처음 방문한 건 1988년이다. 당시 나는 서양미술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일에 열중해 빈에 간 목적도 미술사미술관의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 벨베데레 궁전미술관The Belvedere Museum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를 보는 것이었다.
이 도시에서 처음 실레의 진품 앞에 섰을 때의 생각은 전에 『청춘의 사신』이란 책에 썼던 적이 있다.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였던 나는 분명 정신의 평형을 잃고 있었다. 매일 해질녘이 되면 청록색 늪 수면에 문적문적한 허연 익사체가 둥실 떠오르는 망상에 사로잡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되지 않았다. 석양의 하늘이 늘 피나 고름 색깔로 보였다. 빈에 가 보니 그건 바로 실레의 그림과 같은 색채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막을 연 20세기는 파괴와 대량살육의 세기였다. 에곤 실레는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그것을 감지하고 경련하는 듯한 선과 피 또는 녹슨 쇠와 같은 색채로 불안과 고뇌를 표현했다. 그 시대는 한 세기 뒤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이래 빈을 찾은 건 아마 다섯 번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빈을 좋아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도시는 언제나 나를 암울한 기분에 젖게 만든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도, 오페라를 즐길 때도, 링(도시 중심부를 에워싼 환상도로)에서 화려한 야경을 바라볼 때도 항상 속에서 차가운 불안이 치밀고 올라온다. 여기서 오래 살면 분명히 미쳐버릴 것이다, 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내가 오페레타를 보기 시작한 게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다. 처음 본 건 2001년, 특별히 오페레타를 본다는 의식 없이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본 <박쥐>다. 이 작품은 전에도 썼다시피 한스 노이엔펠스의 도발적인 새 연출로, 하나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그 뒤 모두 녹화영상이긴 했으나 고전적 명연이라 할 수 있는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1930~2004) 지휘 바이에른 주립가극장공연(1986)과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Vladimir Jurowski(1972~ ) 지휘 그라인드본 음악제 공연(2003) 등 포복절도할 공연을 보고 <박쥐>라는 작품의 ‘완성도 높은 야단법석’에 감명을 받았으며 그 이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오페레타라는 장르를 조금씩 달리 보게 됐다. 하지만 오페레타가 ‘경박한 야단법석’이라는 생각이 없어진 건 아니다. 왜 이토록 야단법석으로 일관하는 걸까, 그 배경에 무엇이 있을까, 그런 의문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파리에서 레하르Franz Lehár(1870~1948)의 <메리 위도 The Merry Widow>를, 프랑크푸르트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집시 남작 Der Zigeunerbaron>을 본 적은 있으나, 역시 본바닥 빈의 오페레타 전당인 폴크스 오퍼Volksoper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슈타츠 오퍼Staatsoper(국립 가극장)는 귀족과 상류층 시민을 대상으로 한 궁정가극장의 흐름을 헤아릴 수 있는 곳인데 비해 폴크스 오퍼는 늘 서민적이고 홀가분한 극장이다. ‘폴크스volks’라는 말은 보통 ‘국민’이나 ‘민족’으로 번역되지만 이 경우는 ‘민중’이나 ‘대중’ 쪽의 뉘앙스가 짙다. 나는 2007년에 처음 이 폴크스 오퍼에서 엠메리히 칼만Emmerich Karlman(1882~1953)의 <백작 부인 마리차 Countess Maritza>를 봤다. 이번에는 슈타츠 오퍼에서 <세비야의 이발사>, <박쥐>,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를, 폴크스 오퍼에서 <미소의 나라 Das Land Des Laechelns>와 <작은 새장수 Der Vogelhaendler>를 봤다. 이어 부르크 극장에서 라신Jean-Baptiste Lacine(1639~1699) 원작의 연극 <페드르 Phedre>도 봤다.
(사진은 <박쥐> 프로그램 초연 포스터)
비엔나 오페레타Vienna Operetta의 원년은 1860년으로 돼 있다. 그 해에 파리에서 이미 평판을 얻고 있던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1819~1880)가 빈으로 초청받았고 <천국과 지옥> 상연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오펜바흐는 거의 매년 빈에 초청됐으나 1864년 ‘왈츠 왕’으로 불리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친해져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오페레타를 써야 합니다”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로부터 7년 뒤 ‘왈츠 왕’은 <인디고와 40인의 도적 Indigo und die 40 Ruber>이라는 작품에서 오페레타 작곡가로 데뷔하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왈츠 왕’에서 ‘오페레타 왕’으로 변신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19세기 전반의 빈은 유럽 보수반동의 아성이었다. 외무장관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1773~1859)가 주도한 빈회의에서 반혁명적인 정통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반동적인 국제질서는 산업혁명의 진전과 신흥 부르주아지의 대두, 중남미와 그리스 독립운동, 그리고 프랑스 7월 혁명 등을 거쳐 날로 거세진 자유주의적 개혁 요구로 동요하게 된다. 1848년에 일어난 프랑스 2월 혁명은 각지로 전파돼 빈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재상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황제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1793~1875) 대신 18살의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1830~1916)가 즉위해 흠정헌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이윽고 반동파가 세력을 탈환하고 개혁은 정체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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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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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