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어느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선생이 (북의) “어용 예술가”로 전락했음을 암시하면서 말년의 선생이 ‘조국’으로부터 거절당했기 때문에 ‘독일’을 ‘조국’처럼 여기게 됐다고 썼다.(이회성,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死者と生者の市)」, <문예춘추>, 1996년)
이것이 몰이해에 따른 중상(中傷)이라는 것은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앞서 얘기한 <화염에 싸인 천사들>을 완성한 사실만 보더라도 분명하지 않은가. 윤 선생의 작품을 볼 때 초기 작품에서부터 평양에서 초연된 <나의 국토, 나의 민족이여!>(1987)를 거쳐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분단 극복과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있어도 현존하는 국가체제에 맹종하거나 정치 지도층을 찬미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보기엔 ‘어용 예술가’라는 호칭과 가장 동떨어진 인물이 바로 윤이상이다.
이 소설가는 같은 작품에서, 윤이상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혼의 승화를 체험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신통찮은 슈베르티아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주인공(소설가 자신의 분신)의 입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슈베르티아데’란 슈베르트의 벗들이 연 살롱 콘서트를 두고 하는 말이어서 이 표현은 부정확한 것이지만, 문맥상으로 보건대 “나는 슈베르트를 좋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윤이상 음악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 딱해 보이지만, 그게 자기 개인의 기호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거기에 이어 이 소설가는 도쿄에서 열린 탄생 75주년 음악회 견문이랍시고 회장에 모인 “‘좌익(左) 동포’(즉 총련계 동포)들이 ‘전혀 모르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쓰고, 그 동포들은 음악이 ‘좋다’ ‘나쁘다’는 판단을 ‘위’(즉 총련 또는 북의 권력)에 맡겨 놓고 있다고 썼다. 여기서 시사하고 있는 것은 탄생 75주년 음악제는 음악에 무지한 ‘좌익’동포들을 동원해서 열었다, 말하자면 윤이상은 ‘어용 예술가’다, 라는 이미지다. 하지만 만약 윤이상이 ‘어용 예술가’였다면 대중영합적인 작품을 썼을 것이다.
윤이상 작품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에는 늘 “난해하다”는 평이 따라다닌다. 나는 유럽에서도 현대음악 연주가들 공연장을 즐겨 찾았지만 언제나 객석엔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일본이나 한국 등에서도 현대음악 연주회는 공적 기관이나 기업의 지원 없이는 재정적으로 곤란한 상태에 있고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 음악가는 ‘어용 음악가’다. 그런 상황에서도 뛰어난 음악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힘든 싸움[苦?]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궁정이나 교회 등 후원자(patron)의 비호를 받으며 귀족계급을 놀림감으로 삼았던 모차르트가 바로 그 선구자였다.
윤이상 선생이 타계한 지 10년 남짓 지난 2008년 5월, 나는 F와 함께 통영을 찾아갔다. 윤이상 선생이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돌아갈 수 없었던 고향이다.
우리는 우선 남망산 공원의 자그마한 전망대에 섰다. “아…”,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이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일찍이 선생의 베를린 자택에서 본 파노라마 사진 그대로의 앵글이었다.
우리는 기분 좋은 나무 그늘에 서서 오랫동안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안온한 산들에 에워싸인 작은 항구였다. 몇 갈래의 항적을 그리면서 크고 작은 배들이 차례차례 항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배의 엔진소리가 주변 산들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밤에 가끔씩 저를 데리고 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때 우리는 조용히 배를 타고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소리나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은 이 배에서 다른 배로 이어졌습니다. 소위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로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피아노의 떨림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 했습니다.”
<상처입은 용>에 나오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묘사다. 이것은 1920년대의 기억을 말한 부분인데, 지금도 저쪽 대안(對岸)에서 누군가가 노래하면 그것이 해면과 산을 통해 메아리가 되어 이쪽까지 들려올 것 같다. 어디선가 어부가 아름답고 침울한 남도창을 한 자락 불러주지 않을까. 윤 선생은 고향 바다에 조용히 낚싯줄을 드리우고 마음 속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음악에 지그시 귀를 기울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민족분단의 살벌한 현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통영 거리 여기저기에 내 눈에 익숙한 윤 선생의 얼굴이 있었다. 음악제 포스터였다. 내게는, 선생 얼굴은 굳어 있었고 어쩐지 분노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2007년 9월 나와 F는 서울에서 열린 윤이상 페스티벌에 매일 빠짐없이 나갔다.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엄청 쏟아지던 9월 19일 밤에는 TIMF 앙상블 실내악 연주회가 열렸다. 그날 밤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나>(1983)였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곡에도 심한 상극 양상이 나타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온화하고 명상적인 인상이 더 강했다. 이 곡이 만들어진 것은 1983년, 내가 처음으로 서베를린의 자택으로 선생을 찾아갔던 해다. 저 어둡고 서글프고 험난했던 세월에 윤이상 선생이 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음악을 작곡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 윤이상 음악을 연주하는 젊은 사람들 다수는 내가 지금까지 얘기해온 시대적 배경까지 생각해보진 않았을 것이다. 윤이상 음악도 앞으로 지금과는 다른 시대, 다른 사회에서 여러 가지로 새롭게 해석되고 연주될 것이다. 그게 꼭 나쁘다곤 할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모차르트나 쇼스타코비치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1906~1975)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들이 어떤 시대에 살았고 어떤 고뇌를 헤쳐 나가면서 작품을 창조했는지 상상해보듯이 윤이상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먼 미래의 사람이든 어느 외국 사람이든 그 사람 나름대로 조선민족의 분단 고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작품이 지닌 ‘고전적 가치’라고도 할 수 있다. (*)
--------------------------
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
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