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2일, 나와 F는 몇 번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베를린으로 갔다. 여행 목적은 윤이상 선생을 만나 뵙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제대로 된 ‘글쟁이’가 된다면 <상처입은 용>의 속편을 써보겠다는 염원을 속으로 품고 있었다. 윤 선생은 고령이어서 건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힘이 돼 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아직 한몫할 수 있는 ‘글쟁이’는 아니었으나 선생한테서 진실한 가르침을 받고 그 단편이나마 기록하는 것이 내 의무라는 절실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F가 머뭇거리고 있는 내 등을 떠미는 듯 “과감하게 해야 돼!”하고 힘껏 격려해주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윤 선생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전화선 저쪽 편에서 윤 선생은 “오, 서군인가. 지금은 거의 외출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네만, 자네라면 만나지. 자, 오시게”하고 말씀하셨다. 그르렁거리는 천식음과 뒤섞인, 힘들어 뵈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에 도착한 뒤 댁에 전화를 걸어 보니 시중드는 사람이 받아 “선생님은 입원중이고 사모님도 안 계신다”는 말만 할 뿐이어서 난감했다.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은 꽁꽁 얼어붙었고 눈까지 내렸다. 그날 밤에야 가까스로 이수자 부인과 전화가 연결돼 비보를 접했다. 윤이상 선생은 그날 오후 4시 반, 베를린 슈판다우 병원에서 78년의 생애를 마감했던 것이다. 뭉기적거리며 대책 없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나는 인터뷰할 기회를 간발의 차로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흡사 하늘[天界]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치는 상처입은 용의 비늘이 벗겨져 지상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틀 뒤인 11월 5일, 두텁게 쌓인 눈을 밟으며 클라도브의 선생 댁으로 조문을 갔다. 현관으로 마중 나온 이수자 부인의 하얗게 센 머리칼을 보니 뜨거운 것이 뭉클 치밀고 올라왔다.
독일 법률에 따라 유해는 병원에 안치돼 있었으나 2층 서재에 간소한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액자에 든 영정 뒤쪽 벽에 암갈색으로 변한 낡은 파노라마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선생의 고향 통영 항구의 경관이었다.
윤 선생의 타계 소식은 독일에서 크게 보도됐다. 일본에서도 주요 매체가 전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작곡가 아키야마 구니하루(秋山邦晴)가 쓴 ‘평화를 위해 싸우면서 동아시아 음(音)을 추구’라는 제목의 추도기사일 것이다.(<아사히신문> 1995년 11월 7일 석간) 일본쪽 추도기사에는 또 일본인 작곡가를 키운 ‘은인’이라는 평가까지 덧붙여졌다. 현재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현대음악 작곡가 호소카와 도시오(細川俊夫)는 윤 선생의 제자인데,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윤 선생에게 가장 친숙했던 사람들은 일본 음악가들이 아니었을까. 선생 모국의 음악가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선생과 좀체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메모리, 윤 선생」, <음악예술> 1996년 1월호) 호소카와의 이런 지적은 사실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윤 선생 별세 소식은 크게 보도됐다. 일례로 <한국일보>(1995년 11월 5일) 사설을 인용해보자.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 조국방문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채 4일(원문 그대로)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중략) 윤이상의 모국방문은 지난해 9월에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제’를 계기로 그가 귀국하기를 희망함으로써 실현될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최종 단계에서 한국정부와 윤이상 자신이 각기 과거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 사죄와 해명을 요구하고 대립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지난해 12월에는 도쿄를 방문한 윤이상이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고 음악활동에만 전념하겠다는 마지막 귀국신호를 보냈으나 한국정부는 이것을 무시해버렸다. (중략) 윤이상의 귀국이 실현됐더라면 그것은 윤이상을 친북인사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한국인으로 세계에 자랑할 좋은 기회가 됐을 것이다. 북한만의 윤이상이 아니라는 걸 널리 알리는데 한국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
의외라고 할 만큼 호의적으로 썼으나, 잘 읽어 보면 이 글의 필자가 윤이상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위대한 한국인으로 세계에 자랑한다”고 했고, “북한만의 윤이상이 아니라는 걸 널리 알린다”고 했다. 거기엔 모든 조선민족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의 명예에 대작곡가의 명성을 갖다 붙이려는 욕구가 드러나 있다. 이런 분단 사고방식이야말로 윤 선생이 평생 맞서 싸운 대상이었다.
윤 선생이 타계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선생이 한국정부에 귀국을 허락해달라고 ‘애원’했다는 날조 기사가 유포됐다.(「독점 공개-‘윤이상씨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귀국을 애원한 2통의 편지’」, <월간 조선> 1997년 4월호) 그 기사에는 윤이상 자필이라는 1994년 6월 26일치, 7월 25일치 편지 내용이 공개돼 있다. 그러나 첫 번째 편지는 귀국 조건으로 자신의 명예회복을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결코 ‘애원’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는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겠다”는 ‘전면 항복’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2통의 편지 내용이 크게 모순된다. 윤 선생 유족은 기자회견 등을 통해 곧바로 반박했다. 그 주장은 우선, 두 번째 편지의 필적이 서명만 빼고는 몽땅 가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수자 부인은 당시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이 윤 선생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했다. 1994년 8월 11일치의 이 장관 서한은 “앞으로는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하고 있다. 윤 선생의 두 번째 편지(7월 25일치)가 진품이라면 선생이 ‘전면 항복’을 한 뒤에 한국정부 담당자가 이런 요청을 담은 편지를 보낸 셈이 되는데,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문부식, 「좌절된 귀향의 꿈」, 『레드 콤플렉스』, 삼인, 1997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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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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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