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용>에 옥중 작곡에 관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루이제 린저: 당신에게 탄복했어요. 자신에 대해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다니… 게다가 희극 오페라까지 쓰다니! 그건 도교(道?)의 승리로군요. (…)
윤이상: 네, 나는 옥중에 있었습니다만 마음까지 갇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아주 행복해지기조차 했습니다. 나는 늘 자신을 주제로 한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는 방북 때 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촉발되고 옥중에서 작곡한 <이마쥬-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1968)이다.
제2기는 그 이후 대체로 1980년까지로 볼 수 있다. 동베를린 사건 경험이 작곡가 내면에서 서서히 승화돼 간 시기에 해당한다. 윤이상은 1973년에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해외 한국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첼로 협주곡>(1976)과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협주곡>(1977)이다.
제3기를 획한 것은 <밤이여, 열려라>(1980)이다. 1981년에는 <광주여 영원하라!>가 발표됐다. 1983년부터 87년에 걸쳐 5곡의 교향곡이 작곡됐다. 바로 구사쓰 국제음악아카데미 참석차 방일한 시기에 해당한다.
6월항쟁을 거쳐 다음 해인 1988년에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열망이 높아지는데, 윤이상 선생도 휴전선에서 남북공동 음악제를 열자고 제창한다. 이런 전례 없는 제안은 윤 선생처럼 존재감이 있는 분이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윤 선생은 한국에 많은 벗과 제자들이 있고, 또 북에는 ‘윤이상 음악 연구소’가 있다. 말하자면 선생 자신이 ‘분단을 넘어선 존재’였다. 당시 때때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스포츠신문까지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정도로 이 음악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높았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음악제는 결국 한국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동베를린 사건 뒤 베를린에 계속 머물고 있던 윤이상 선생에 대해 1980년대 이후 한국정부 관계자가 여러 번 귀국을 권유했으나 윤 선생은 귀국조건으로 ‘동베를린 사건’에 대한 정부의 사죄와 명예회복, 국가보안법 폐지와 정치범 석방 등을 일관되게 요구했다.
김영삼 문민정권의 탄생을 전후해서 한국 내에서 오래 계속돼온, 윤이상 음악을 터부시하는 풍조가 완화되면서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제’ 기획이 추진됐다. 이 기회에 선생의 38년 만의 귀향이 실현될 수 있을지 큰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윤 선생은 한국정부가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범민련’ 해외본부장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 귀국은 개인 범주를 넘은 정치적 의미를 띨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고집하면서 한국에 도착하면 “과거의 행동에 반성하는 점도 있다” “앞으로 일절 북과는 연을 끊는다”는 뜻을 표명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 요구를 거부하고 윤 선생은 귀국을 단념했다. 한편 ‘범민련’ 관련 일부 인사들도 윤 선생의 한국 입국이 해외운동에 타격을 줄 것이라며 강경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윤이상 음악제’ 자체는 실현됐고 성공을 거두었으나 작곡가 자신의 귀향 기회는 이렇게 해서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 윤이상 선생은 미국에서 남북 음악가들을 불러 모아 음악제를 여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누군가가 북에 대해 “윤이상은 매수당했다”고 중상하는 바람에 북쪽 음악가의 참가가 취소되고 음악제 자체도 무산됐다.
1994년 12월 17일 평양에 들른 뒤 일본에 온 윤 선생은 도쿄 시내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에서 물러나 음악활동에 전념하겠다. 나의 민족애와 통일 염원은 음악이 대변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평생 쉬지 않고 싸워온 윤이상이라는 인물은 만년에 이르러서도 고향으로부터 거절당하고, 함께 고생한 사람들 일부로부터도 비난을 받기에 이른다. 선생은 이 고독과 고뇌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는 윤 선생은 인생 마지막 악장(?章)에 이르러 자신의 예술적 생애, 특히 정치에 관여한 것을 후회했던 걸까?
“나는 (동베를린 사건으로)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뒤 인간생활에서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정치가 아닌지, 그걸 단언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세상 중에는 정치 아닌 것이 거의 없다는 것. (…) 진정한 인간문제, 사회문제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고 힘을 쏟는 것. 이것은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할 일이고, 또 가장 인간적인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내 음악도 지금은 그런 내용으로 쓰고 있습니다.”(1988년 일본 작곡가 다케미쓰 도오루와의 대담. 『나의 조국, 나의 음악』에 수록)
윤 선생의 생애 마지막 작품은 교향시 <화염에 싸인 천사들>(1994)이다. 노태우 정권하에서 탄압과 부정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을 기념하는 음악이다.
윤이상은 음악평론가 볼프강 슈페러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은 정치적인 투사가 아니라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사회가 붕괴에 직면해 개개인들이 무력감에 빠진 현실을 직시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동했고 자신의 몸을 불태움으로써 사회를 눈 뜨게 만드는 신호를 보내려고 했던 겁니다. (…) 나는 내 양심을 종이에 서둘러 기록했습니다.”
이 교향시는 1995년 5월 9일 도쿄에서 초연됐고 같은 해 9월 17일 베를린 음악제의 일환으로 열린 윤이상 탄생 78주년 기념연주회에서도 연주됐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이 연주회에 참석한 윤이상은 연주가 끝난 뒤 쉼 없이 박수 치고 환호하는 청중에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 그것이 마지막 외출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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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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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