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구사쓰 국제아카데미 이후 F와 나는 급접근을 했다. 우리의 공통 화제에 윤이상 선생은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그만큼 윤이상 음악과의 만남은 F에게도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를 묶어준 게 윤 선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F와의 관계는 양쪽 집안은 물론 친한 벗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F가 일본인이라는 게 큰 이유였지만, 또 한 가지 큰 이유는 내가 무직에 수입이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생활결격자였고, 그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F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1985년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또 유럽에 갈 일이 생겼고, 그때 처음으로 잘츠부르크에도 들러보기로 했다. 나는 다만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제로 알려진 잘츠부르크라는 곳에 내 발로 직접 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음악제를 현지에서 즐겨보겠다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내게는 ‘신분이 다른 사랑’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들은 F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당돌하게 “리코더를 사다 줘”라고 했다. F는 중학교 음악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교실에서 그걸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연주도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짐짓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걸 계기로 질질 끌려가듯 관계가 깊어져 버릴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잘츠부르크의 겨울은 음악제 시즌이 아니다. 어둡고 추울 뿐이다. 구시가지의 바이세 타우베(흰 비둘기)라는 오래된 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정적이 감도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모차르트의 생가에 갔더니 그 이웃에 악기가게가 있었다. 무심코 창 안을 들여다보니 온갖 종류의 리코더가 진열돼 있었다. 출발 전 F가 전화로 한 말을 떠올렸다. 먼 일본에서 F가 나를 불러 세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악기상은 25년이 지난 지금 당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건재하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나와 F는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됐다. F가 혼자 살고 있던 아파트에 내가 기어들어갔다. 아침에 출근하는 그녀를 배웅한 뒤 저녁까지 발표할 데도 없는 원고를 쓰며 지냈다.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외부에서 보면 마치 ‘기둥서방’으로 비칠 수 있는 생활이었다.
1987년의 6월항쟁 다음 해에 긴 감방살이를 하고 있던 형들 중 한 명이 석방됐고, 나머지도 조만간 출옥할 것으로 보이는 시기에 나는 인생의 중대 기로에 서게 됐다. 형들이 옥중에 있을 동안 내 할 일은 그들의 석방운동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석방되면 나는 내 길을 내 손으로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40살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학자와 연구자가 되기에는 늦었다. 취직을 하려 해도 직업인으로서의 내 무능은 이미 증명이 끝난 상태였다. 또 민족운동이나 시민운동 활동가 자질이 없다는 것도 나 자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글쟁이’가 되는 것 외에 어떤 미래상도 그릴 수 없었으나 그것마저 아무런 구체성이 없었다. 그런 내가 지금 ‘글쟁이’가 돼 있는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사장과 정치사상학자 후지타 쇼조(藤田省三) 선생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선 지금은 이 정도로 언급해 두자.)
그런 중에도 윤이상 선생과의 관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가 베를린에 갔을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구실을 만들어 선생 댁을 찾아갔다.
1992년 11월에는 도쿄에서 1주일에 걸쳐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페스티벌’ 행사로 크고 작은 연주회와 강연회가 열렸고, 나와 F는 일본에 온 선생 부처와 재회할 수 있었다. 그때 기념출판된 책 『나의 조국, 나의 음악』에는 나도 “우뚝 솟은 사람”이라는 단문을 기고했는데, 이 책에서 선생이 자신의 예술에 대해 해설한 글을 읽었고 동시에 선생의 많은 작품들을 실제로 들을 수 있어서 윤이상 음악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윤이상 선생의 작곡활동은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눠 개관할 수 있을 것이다.
제1기는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1959)으로 데뷔한 이후 <이마쥬-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1968)에 이르는 약 10년간이다. 이 시기에 서양악기를 구사해서 동아시아 음악을 재현하려는 ‘음색작법’을 추구했고, 동시에 ‘주요음(하우프트 톤)’ 개념이 확립됐다.
‘주요음’이란 윤이상 선생이 조선과 동아시아 전통 음악의 특징인 단음의 아름다움과 활력에 착안해서 이론화한 개념이다. 두 개의 음이나 하나의 음 정도의 장식음을 거쳐 하나의 음이 정착되는데, 이 음은 처음엔 거의 비브라토vibrato가 없는 직행(直行)적인 음이지만 점차 비브라토가 증대된다. 비브라토가 한계에 도달할 정도로 커졌을 때 어떤 굴곡(屈曲), 만곡(?曲), 장식적인 요소를 거쳐 한 단계를 넘어선다. 그리고 또 그다음의 생명력을 얻는다. 하나의 음이 생성해서 소멸하고 재생하는 무궁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을 윤이상 선생은 종종 붓(毛筆) 글씨(墨跡)에 비유한다.
이 제1기에 ‘동베를린 사건’이 일어났다. KCIA(한국중앙정보부)에 의해 독일에서 한국으로 납치돼 투옥당한 윤이상 선생은 영하의 한기로 얼어붙는 독방에서, 그리고 병으로 보석을 받고 수용된 병실에서 연필과 오선지만으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8) 등 3곡을 작곡했다. 완성된 악보가 가족에게 전달됐을 때 그것이 암호가 아닌지 의심한 KCIA는 음악학자에게 감정을 의뢰했다고 한다. 암호 의심을 받은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윤이상이 아직 수인의 몸이었던 1969년 봄 뉘른베르크에서 상연돼 호평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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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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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