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왔냐고요? 아니요. 하지만 그렇게 큰 소리가 그토록 많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놀라고 흥분했습니다. 나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음악은 단음뿐이어서 화음이 없으며, 또 소리는 무척 조용해서 하나하나의 소리를 따로따로 듣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 겁니다. 그건 아주 색다른 것이었습니다.”
내게 이 삽화만큼 서양음악과 동양음악의 차이를 알기 쉽게 얘기해준 건 없다. 실로 눈을 가렸던 비늘이 벗겨져 나간 것이다.
처음엔 “아름답다”고 느끼진 않았던, 그때까지 몰랐던 음향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 데서도 음악이라는 예술이 지닌 비밀이 잘 드러나 있다. 식민지시대에 자란 윤이상 소년은 이처럼 전통문화에서 근대문화로 가는 과도기를 경험했는데, 내 경우는 그 반대의 경로를 거쳤던 것이다. 처음 윤이상 음악을 들은 순간 “아름다운가?”하고 누가 물었다면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갖고 있던 아름다운 음악이란 기성개념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내게 아름다운 음악이란 바로 <들장미> <아베마리아> <뜰에 무성한 풀>(<여름의 마지막 장미 The Last Rose of Summer>) 등의 서양음악이었다. 그것은 ‘미’의 기준임과 동시에 ‘근대성’이나 ‘선진성’의 기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준 자체가 일본사회에서 학교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주입받은 것이었다.
“아름답다”고 즉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름답지 않다”며 등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뛰어난 예술은 그래도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리하여 듣는 자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키워주는 것이다. ‘색다른 것’이 이윽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모해 간다. 내게 윤이상의 음악은 그런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도쿄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잠시 인사를 했을 뿐인 윤이상 선생을 나는 어쩐지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동베를린 사건의 생환자요 해외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윤 선생을 만나 형들 구원운동에 관한 조언과 격려를 받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예술가로서의 선생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더 강했다. 윤이상이라는 예술가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 정치와 예술이라는 가치의 대립과 상극 한복판에 있으면서 동양적 전통 속에 자신을 가두지[自閉] 않고, 서양적 근대로 비약하지도 않으며, 정치냐 예술이냐의 양자택일도 아닌, 양자가 갈등하는 고뇌 속에서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창조하려 했다. 그런 예술가의 육성을 가까이서 접하고 싶다는 일념이었다. 그것은 바꿔 말해 나 자신도 어떤 것이 됐든 예술과 손잡고 싶다는 바람, 그렇게 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싶어한 미숙한 나그네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물어보려고 늙은 스승을 찾아가는 듯한 생각이 들게 했다.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고 서베를린 교외 클라도브Kladow에 있는 선생 댁을 찾아갔다. 매섭게 추운 날씨에 눈까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에 담고 있던,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생각을 토해내고 싶었으나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음악이라는 예술에 대한 내 관심을 언어로 표현할 방도를 몰랐고, 게다가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조선말도 서툴렀다. 선생과 사모님은 모두 일본어를 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일본어로 얘기했다. 당연히 대화엔 탄력이 붙지 않았고 듣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나는 옥중의 형들 근황을 약간 얘기했고 선생은 침울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여주었다. 선생은 위로나 격려를 말로만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도 밝은 미래나 분명한 방향 따위는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수자 부인이 광주사태 때 “선생이 텔레비전으로 보도를 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하고 말했다. 부인의 얘기를 선생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울면서 작곡하셨어요”하고 부인은 덧붙였다.
<상처입은 용>에 들어 있는 <첼로 협주곡>(1975/76) 서술내용이 떠올랐다.
“그 종말부 옥타브의 도약을 생각해보세요. 이 도약은 자유, 순수, 절대를 향한 희구와 바람을 의미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옥타브가 G#3음에서부터 A3음(첼로 제1현의 음)까지 글리산도(glissando, 활주음)로 올라가며, 이 A3음을 트럼펫이 끌어당깁니다. 첼로는 거기까지 도달해보려 하지만 잘 안 됩니다. 첼로는 글리산도로 G#3음에서부터 4분의 1음만큼 높은 곳까지 올라옵니다만 그 이상 올라가진 못합니다.”
겨우 4분의 1음. 극히 미묘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공극(空隙). 그 미세한 틈이 만들어내는 음의 울림은 상처입은 용의 몸부림이다. 몸부림치는 용은 그 공극을 넘어 해방과 조화의 환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예술가 윤이상은 4분의 1음의 공극을 응시하고 있다. 해방을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면 할수록 그 공극의 암흑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 댁을 떠날 때 전화로 부른 택시 운전수는 동양계 사람이었다. 운전수는 백미러로 내 표정을 살피면서 자신은 한국인이라며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묵고 있는지, 이제 무엇을 할 예정인지 등을 캐묻기 시작했다.
먼 서베를린까지 와서 어쩌다 부른 택시 운전수가 하필 한국인이라니, 이런 우연이 있을까? 혹시 이 운전수가 기관원은 아닐까?
국제여론의 압력으로 윤이상 선생을 서베를린으로 돌려보낼 때 당시 중앙정보부(KCIA) 부장 김형욱은 윤 선생에게 “앞으로도 필요하면, 우리는 다른 수단을 써서 당신 입을 닫게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단다. 그렇다면 선생이 늘 감시당하고 있다고 봐도 이상할 게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 운전수에게 차를 세우라고 해 알지도 못하는 어느 길모퉁이에서 내렸다. 눈은 계속 쏟아지고 있었고, 어두운 길모퉁이에서 나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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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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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