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까지 2010년 잘츠부르크 음악제 현지보고를 보냈는데,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가 나의 음악순례 길을 더듬어가면서 윤이상 선생과의 인연을 돌아보고자 한다.
1983년 늦가을, 첫 유럽 여행에 나섰을 때 나는 서베를린으로 윤이상 선생을 찾아갔다.
내가 윤 선생을 처음 만난 건 1981년 5월 13일 도쿄에서 열린 <상처입은 용>의 일본어판 출판기념회에서였다. 한국 민주화운동 협력자이자 내 형들의 구원운동에 중요한 지원자이기도 했던 국회의원 비서 고토 마사코(五島昌子) 씨가 나를 그 모임에 불러주었다. 30살이었던 나는 참석자 중에서 가장 젊다는 이유로 윤 선생에게 화환을 증정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조바심과 긴장 때문에 윤 선생과는 거의 말을 주고받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나는 그전부터 선생의 존함은 알고 있었다. 1967년에 ‘동베를린 사건’이 발표됐을 당시 고교생이었던 나는 그것을 분단된 내 조국에서 일어난 무서운 사건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구속당하고 납치당한 사람들 중에 작곡가와 화가, 물리학자 등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졌지만 그 이상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다. 한데 1971년 형들이 투옥당하자 그 사건은 갑자기 절박한 것으로 다가왔다. 형들의 구원활동을 벌일 때 국제여론의 힘으로 희생자 원상회복을 실현한 동베를린 사건의 전례를 참고하려 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희생자들이 납치, 투옥, 고문이라는 상상을 절하는 고난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고 싶었다. 형들이, 그리고 우리 가족이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희망을 거기서 찾고 싶었던 것이다.
즉 내 관심은 처음엔 윤이상 선생의 정치적 수난자로서의 측면 쪽에만 쏠려 있었지 예술가로서의 측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입은 용>을 읽은 순간 일변했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책 5권만 들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나는 이 책을 거기에 넣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윤이상 선생의 정치적 투쟁과 예술적 투쟁이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지 알게 됐다. 식민지지배, 민족분단, 군사독재라는 현실과의 격투가 그의 예술 그 자체를 밑바탕에서부터 규정하고 있었으며, 또 그 격투는 그의 예술적 영감과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출판기념회 자리에서는 분명 <가사>(1963)가 다쓰미 아키코(辰巳明子)의 바이올린, 다카하시 아키(高橋アキ)의 피아노로 연주된 걸로 기억한다. 내가 처음 들어 본 윤이상 선생의 작품이다. 그것은 내 귀에는 익숙지 않은 음악이었다. 사교와 정치집회를 겸한 듯한 파티에서의 연주였기 때문에 짧게 끝나버렸다. 그 음악에서 강한 흡인력을 느낀 나는 우선 <피리>(1971)의 카세트테이프를 입수해 들어봤다. 들어본 직후 흥분한 나는 작은 잡지에 ‘<상처입은 용>이 말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기고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피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유머와 애조(哀調)로 채색된 공간, 그리움과 친근함이 가득 찬 공간에 저항 없이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유년기의 아련한 기억 그 이전의 원초적인 공간, 굳이 비유하자면 모태 내부의 공간이다. 거기에는 내게 적대하고 상처 입히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중략) 현대 독일의 연주자 하인츠 홀리거가 서양악기 오보에를 구사해 한국 전통 악기(피리)의 음을 낸다. 그리고 그것은 피리 소리이면서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 음색에 대한 단순한 복고취미나 그 현대풍의 윤색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예외 없이 우리에게 자기혐오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저 관광객용 민속음악 부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민족중흥’을 들먹이는 위정자들의 거창한 연설을 위한 반주도 아니요 민중의 무기력과 허약만을 상기시키는 음울한 한탄가도 아니다.”
30년 전의 글이지만 적어도 첫 만남의 충격과 그 시점에서 싹튼 문제의식을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이니치(在日, 재일동포) 2세인 나는 당시 조선민족 전통악기인 피리 등을 제대로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서양 클래식 음악의 문화적 축적도 없었지만 동시에 민족음악의 문화적 자원도 없었다. 그것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피리의 음색을 몰랐기 때문에 홀리거가 연주한 오보에 음에서 피리를 재발견한 게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오보에 연주에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몰랐던 피리의 음색을 추측했다. 이미 거의 잃어버리고 만 내 음악적 모어(母語)의 본거지를 그렇게 해서 찾아간 것이다. 이처럼 윤 선생의 음악은 내게, 나는 누구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문제를 음악이라는 측면에서 날카롭게 들이댔다. 그것은 또한 나를,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커다란 문제와 맞대면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의 음악순례 길에서 중요한 이정표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상처입은 용>에는 내 음악관에 중요한 자극과 시사를 준 내용이 있다.
어느 날 8살의 윤이상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서양풍의 근대교육을 하는 학교를 찾아갔다. 아버지가 학교 선생과 얘기를 하는 동안 소년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진기한 가구 같은 것이 있었다. 한 남자가 방에 들어와 그 앞에 앉더니 희고 검은 건반을 눌렀다. “그러자 음악이 흘러나온 겁니다!”
그것은 소년이 처음 본 서양악기 오르간이었다. 대담 상대인 루이제 린저가 “그게 말하자면 서양음악과 당신의 첫 만남이었군요. 그 음향이 아름답다고 느꼈습니까?”하고 묻자 윤이상 선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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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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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