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녀가 우리와 같은 열차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가녀린 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듯한 고풍스런 여행가방을 끌고 있었다. 그녀가 트리에스테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우리가 별안간 난민이 돼버린 듯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트리에스테에는 예전에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기다림에 지쳐 갈 무렵 마침내 버스가 왔다. 하지만 그 버스는 소형인 데다 한 대뿐이었다. 모든 승객들을 다 태울 순 없었다. 타지 못한 승객들은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더 기다릴 수밖에 없어 그날 밤 중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F가 “다음 버스로 가요…”라고 했고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트리에스테의 노부인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몇 번이나 사양한 끝에 “그랏체”하고 살며시 인사한 뒤 버스에 올랐다. 이것이 나치시대의 강제이송이었다면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사가 갈렸을 거야. …나는 그때까지도 그런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먼저 탄 쪽이 될지, 뒤에 남은 쪽이 될지, 어느 쪽이 죽음이라는 제비를 뽑은 쪽이 될지는 누구도 모르겠지만.
그 뒤 버스가 몇 번인가 왔다갔다 했으나 그때마다 타지 못한 승객들이 남았다. 어느 이탈리아인 노동자 가족 그룹을 보고 F가 시종 탄복을 했다. 그들은 아주 당연한 듯이 노인이나 바쁜 사람들에게 차례를 양보하고 서로 아이들이 따분해하지 않고 놀 수 있도록 신경써주면서 한 마디의 불만도 입 밖에 내지 않고 담담하게 기다렸다.
결국 그들과 우리는 마지막 버스를 탔다. 우디네Udine까지 버스로 가서 거기서 완행열차로 갈아탔고 한밤중이 지나서야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이미 바포레토(Vaporetto, 수상 버스) 막차가 떠난 뒤여서 우리는 울퉁불퉁한 돌포장 길을 여행가방을 끌며 걸어갔다. 끈적한 기름이 떠 있는 듯한 운하의 수면은 둔탁하게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우리가 잘츠부르크에서 머무르고 있던 기숙사에서는 아침식사 때 다른 숙박객들과 얼굴을 마주치게 돼 있다. 이 음악대학엔 여름학기 강습을 받는 각국 학생들이 와 있다. 낮에는 이들 학생이 받는 레슨 음이 기숙사 안뜰에 울려 퍼진다. 잘 나갈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배우나 음악가들도 있다. 물론 나와 F처럼 여러 나라에서 음악축제를 보러 모여든 사람들도 있다. 숙박비와 식비는 최대한 절약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연주회를 챙겨보고 싶은 음악 애호가들이다.
언제나 홀로 장기체류하고 있던 프랑스 노부인은 모르티에를 “오래되고 좋은 음악 전통을 파괴했다”며 미워했다. 그건 카라얀 시대 이래의 올드 팬이라는 얘기다. 한데 그 노부인이 지난해 잘츠부르크 체류 중에 건강을 잃어 주립병원에 긴급 입원했다. 그 뒤 위험한 상태를 면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는데, 올해는 그녀가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 F는 궁금해 했다. 그런데 올해 들은 소문으로는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공무원이었던 그녀는 정년퇴임 뒤 매년 빠짐없이 음악제를 찾았다. 이로써 그 하나의 역사에 종지부가 찍히게 된 셈이다.
숙소는 달랐지만 매년 연주회에서 마주친 모자가 있다. 차림새는 검소했고 결코 유복해보이진 않았다. 아들에겐 장애가 있었다. 척추가 크게 휘어졌다. 심하게 기운 자세로 걷는 아들 뒤를 자그마한 몸집의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아장아장 따라간다. 다리가 아픈 듯했다. 나이는 70대 중반 정도일까.
우리 자리는 대체로 연주회장 뒤편인데, 아들도 싼 티켓을 사는 듯 항상 우리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연주회 동안 모친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녀는 연주회가 끝날 때까지 연주회장 바깥 벤치에 앉아 2시간도 좋고 3시간도 좋고 줄창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피로와 고뇌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단 한 번 “프랑스에서 오셨나요?”하고 모친에게 물어본 적 있는데, 웃음기도 없이 “아니오, 이탈리아요”하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것으로 대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연주회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우리는 곧잘 이들 모자와 같은 버스에 탔다. 모친은 다리가 아파 버스 타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모친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재빨리 자리를 차지하고는 창 밖을 바라본다. 나이는 40이 넘어 보였는데 행동은 열두세 살 아이 같았다. 만일 모친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 홀로 잘츠부르크에 올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8월7일 소프라노 안야 하르테로스Anja Harteros가 ‘가곡의 밤’에서 브람스의 <죽음, 그것은 차가운 밤 Der Tod,das ist die kuehle Nacht>을 불렀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죽음은 차가운 밤/ 그리고 삶은 더운 낮.
어두워져라, 나는 자고 싶다/ 낮은 진저리가 난다.
8월21일에는 메조소프라노 안젤리카 키르히슐라거Angelika Kirchschlarger와 테너 이안 보스트릿지Ian Bostridge라는 당대 인기가수 두 사람의 ‘가곡의 밤’이 열렸다. 거기서 불린 노래가 후고 볼프Hugo Wolf의 가곡이다. 그 중에서 <죽음이여, 밤에 휩싸여 오라 Komme, o Tod, von Nacht umgeben>라는 곡은 특히 F의 마음에 들었다. 에마누엘 가이벨Emanuel Geibel의 시는 이렇게 노래한다.
죽음이여, 밤에 휩싸여 오라/ 살며시 내게로 오라
그대를 포옹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지 않도록
어느 것이나 노래하고 있는 것은 죽음을 향한 동경이다.
저 모자는 이 음악을 어떻게 들었을까? 해마다 모자는 분명히 늙어 간다. 죽음을 향해 확실하게 걸어가고 있다. 이 두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교회의 종이 “메멘토모리Memento mori(죽음을 잊지 마라)”하고 울려 퍼지는 가운데 줄지어 걸어가는 중세의 순례자와 같다. 두 사람이 음악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고 보는 건 너무 천박하지 않을까. 내게는 오히려 ‘음악의 잔혹성’이라는 상념이 자꾸만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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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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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