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 음악제 청중 가운데서 일본인들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서로 말을 잘 걸지 않는다. 연주회에서 만나도 될 수 있는 한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그것은 냉담하다거나 인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에 거리를 두는 것이 무의식 속에 성벽(性癖)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제에 다니기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2001년 그 일본인다운 일가와 마주쳤을 때 나도 상대방도 애써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한데 축제 소극장의 한스 젠더Hans Zender 연주회 때 나와 F 옆에 어린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때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열도 나고 해서 F 홀로 연주회장에 남겨 두고 휴식시간에 숙소로 돌아갔는데, 내가 그렇게 자리를 떠난 뒤 그 아이가 F에게 말을 걸어왔단다.
다음은 F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소년은 일본 소학교 6학년생이었다. 소학생이 잘츠부르크에서 그것도 현대음악을 듣다니! 게다가 소년은 난해한 젠더의 음악에 대해 F에게 해설까지 해줬단다. 얼마나 총명하고 예쁜 소년인가. 놀란 F가 알아보니 부모와 함께 온 모양이었다. 더욱이 그 소년은 연주회장에 음악제 총감독 모르티에가 나타나자 그에게 걸어가 친한 듯 인사까지 했단다.
그 아이 덕에 아이 부모와도 알게 됐는데 부친은 게이오대학에서 독일문학을 가르치는 이와시타 마사요시(岩下眞好) 교수고, 모친은 독일문학자로 오페라 대본 번역을 하는 구미코(久美子)씨였다.
그 뒤 이와시타 일가와는 거의 매년 만났는데, 친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은 그로부터도 몇 년이 더 지나 이와시타 교수와 내가 같은 나이에다 같은 해에 같은 대학입학시험을 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다. 지방 출신인 그는 입학시험 전 날 동향 선배들 숙소에서 신세를 졌다. 그런데 그 선배들은 수험생인 그를 시위현장에 데려갔다고 한다. 순진한 고교생이었던 그는 선배들의 부추김을 받아 그 다음날 자신이 입학시험을 쳐야 할 대학을 향해 “대학 해체!” 구호를 외쳐댔단다. 그런 게 당시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입시 당일은 큰 눈이 내렸다. 내가 시험을 친 교실은 창문이 깨져 있어서 몹시 추웠던 생각이 난다. 그랬던 우리가 어느새 모두 대학에서 가르치는 몸이 됐고 먼 잘츠부르크에서 서로 알게 된 건 얼마나 기막힌 우연인가. 우리는 약간은 씁쓰레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와시타 교수는 일본 음악잡지에 연주회 리뷰를 집필하면서 오페라 해설 등도 자주 쓴다. 그 때문에 대학이 쉴 때는 반드시 해외 오페라나 음악회를 찾아가는 모양이다. 겨울이나 봄에는 독일, 오스트리아의 오페라 감상이 많다. 여름 순회 루트는 대체로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음악제, 독일이라면 뮌헨 인근에서 시작해 루체른Lucerne 음악제를 거쳐 잘츠부르크까지 온다. 루체른과 잘츠부르크를 바쁘게 왕복하기도 한다.
어느 해 그의 권유에 마음이 동해 나와 F는 루체른 음악제에 갔다. 거기서 들었던, 클라우디오 압바도가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 제7번>은 나의 말러관을 일변시켰다. 그 덕에 안개가 걷히듯 말러가 내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와시타 교수가 나와 F한테 개인적으로 얘기해준 음악회 비평은 피상적인 교양주의적 해설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관한 풍자적 통찰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는 모르티에가 대표하는 혁신적 조류에 대한 지지자이며 그런 관점에 선 그의 비평은 나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점이 많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땀을 많이 흘리는 그가 땀으로 범벅이 된 안경을 닦는 것도 잊어버리고 얘기하는 음악계의 이면 사정이나 저명한 음악가들의 속살들은 때로는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포복절도하는, 상상을 절하는 얘깃거리의 보고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음악잡지에 써달라고 부탁하지만 이와시타 교수는 내 바람을 들어줄 기척도 없다. 대신에 내가 써보고도 싶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유감스럽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우리끼리만 아는 즐거움으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와시타 부부와 사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총명한 소년은 10년 뒤인 지금 건축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돼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여름에도 부모와는 따로 움직이고 있는데, 올해 여름에는 벗들과 스페인으로 건축 견학을 떠났다고 한다.
어느 해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비엔날레 미술전을 보려고 베네치아로 간 적이 있다. 열차로 필라하Villach라는 국경도시까지 간 뒤 거기서 빈발 베네치아행 특급열차로 바꿔 탔다. 그런데 폭우로 국경 너머 이탈리아 쪽에서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열차가 도중에 멈춰 서버렸다. 우리 승객들은 산 속의 본 적도 없는 작은 역에 내려 열차가 다닐 수 있는 다른 역까지의 구간을 왕복하는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버스가 좀체 오지 않았다.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승객들 중에 전에 본 적이 있는 여성이 눈에 띄었다. 잘츠부르크에서 함께 숙박했던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트리에스테Trieste 사람으로, 어떤 작은 가게를 꾸려가고 있었고, 바캉스철이 되면 가게 문을 닫고 혼자서 잘츠부르크에 머무르며 오페라를 보는 게 해마다 거르지 않는 연중행사였다. 인생 유일의 즐거움을 위해 평소엔 근검절약하는 서민인 것이다. 나이는 60대 중반 정도 됐을까. 필시 고독하겠지만 의연하고, 조금도 비참해 보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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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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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