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를 듣고 난 다음날 아침이었을 텐데, 일본에 돌아가려고 공항에 갔더니 게르기에프가 혼자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어라, 저기 게르기에프가 있네…”하고 무심코 내가 F에게 얘기한 순간 F는 사람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이 언제 했느냐는 듯 쏜살같이 달려가 싸인을 받았다. 게르기에프는 저 부리부리한 큰 눈으로 F를 쳐다보더니 말없이 싸인을 해주었다. 그 눈은 붉게 충혈돼 있는 듯했다. 그가 항상 연주 중에 왼손으로 쓸어 올리는 성긴 머리칼은 땀으로 두피에 찰싹 붙어 있었다. 다시 내게로 온 F에게 “어땠어?”하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술 냄새가 났어”하는 한 마디뿐이었다.
그것은 게르기에프가 러시아의 마리인스키 가극장Mariinsky Theatre 관현악단을 이끌고 공격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열심히 세계진출을 꾀하고 있던 무렵의 얘기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라는 큰 무대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하루만 묵은 뒤 아침 일찍부터 매니저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어딘론가 또 다른 도시로 날아가는 것이다. 도착과 동시에 음을 조율하고 총연습을 한 뒤 밤에는 또 무대에 설 것이다. 그런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잔뜩 마신 건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은 예술가라기보다 오히려 야심만만한 기업전사와 같았다. 이런 하드 스케줄이라면 그는 조만간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으나, 게르기에프는 머리칼이 더 듬성듬성해지긴 했지만 내 걱정을 보기 좋게 뒤엎고 그 뒤에도 착실하게 지위를 높여가고 있다. 경탄할만한 에너지다.
F는 덴마크 출신의 바리톤 보 스코브후스Bo Skovhus의 열렬한 팬이다. 20년 전쯤부터였는데, 가끔 라디오로 슈베팅겐 음악제에서 녹음된 걸 듣고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보 스코브후스의 <가곡의 밤>이 2003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열렸다. 라디오나 CD로만 듣고 동경해온 가수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그 무렵 나와 F는 매일처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원인이라고 해봤자 나중에 기억도 해낼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지만, 잘츠부르크까지 함께 가서도 충돌이 이어졌다. 그날도 F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는데, 그래도 저녁이 되자 말쑥하게 몸단장을 하고는 총총걸음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모처럼 그렇게 좋아하던 스코브후스의 콘서트에 가볼 수 있게 됐건만 그녀가 이런 기분으로 그걸 즐길 수 있을까. 속으로 그렇게 끙끙대며 나는 말없이 F 뒤를 따라갔다.
그날 밤 스코브후스가 부른 노래는 볼프, 코른골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이었다. 당당한 체구에서 깊은 광택을 띤 소리가 흘러나와 모차르테움 대형 홀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그냥 아름답다는 차원을 넘어 흡사 황홀한 죽음의 세계로 유혹하는 듯한 신비감마저 띠고 있었다. 역시나 F가 빠져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연주회가 끝나자 F는 출연자 대기실로 가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다. 대기실에서 얼굴을 내민 스코브후스는 붙임성 있는 훈남 청년이었다. F는 그와 함께 서더니 나를 돌아보며 “멋지게 찍어줘요”하고 주문했다. 파인더 너머로 본 그 표정은 “조금 전까지 말다툼을 한 자가 도대체 누구지?”하고 묻기라도 하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본에 돌아온 뒤, 스코브후스와 나란히 선 F가 만족스레 웃고 있는 그 사진을 확대하고 액자에 넣어 방에 걸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빠짐없이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스코브후스를 봤다. 2004년엔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 2006년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그를 만났다. 특히 후자 쪽에서 그가 연기한 알마비바 백작은 고뇌하는 중년남성으로서의 인물조형을 전면에 표출시킨 것으로, 그때까지의 그 배역 이미지를 파괴적으로 일신하는 역사적인 명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스코브후스가 2009년 음악제에서 또 <코시 판 투테 Così fan tutte, ossia La scuola degli amanti>의 돈 알폰소 역으로 출연한다는 걸 알게 된 F의 마음이 다시 들떴다. 2003년에 찍은 그 사진을 들고 가서 싸인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성 펜까지 일본에서 구입해 짐 속에 넣었다. 유럽에서 유성 펜을 사면 엄청 비싸다는 거였다.
<코시 판 투테>의 막이 내리자 F는 가수와 연주자가 나오는 대기실 입구로 직행했다. 나는 예의 그 사진을 안고 허둥지둥 그녀 뒤를 쫓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스코브후스는 나오지 않았다. 30분이나 기다리다 출연자들도 청중도 모두 떠나고 주위가 휑뎅그렁해진 뒤 F는 결국 체념했다.
그는 지금 대스타가 됐기 때문에 틀림없이 ‘오빠부대’의 공세를 피하려고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간 거야. 그런 상상까지 해가며 나는 풀이 죽은 F를 위로했다.
터벅터벅 숙소로 걸어가던 도중 맥주집 같은 대중적인 가게의 실외석에서 남녀 몇 명이 즐겁게 담소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F는 무심코 그곳을 지나치려 했는데, 나는 그 남녀들 중 한 명이 스코브후스라는 걸 알아챘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건 데스피나 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본Patricia Petibon이었다. 나의 상상과는 반대로 고명한 스타들이 관광객, 지역 시민들과 어울려 거의 무방비 상태로 스스럼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라, 저기에 보 스코브후스가…”하고 내가 알려줬는데도 F는 좀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F가 근시여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은 탓도 있었다. 몇 번이나 확인한 끝에 F는 마침내 그 남녀들한테 다가가 머릿속에서 미리 작문해둔 정중한 독일어로 스코브후스에게 말을 걸었다. 스코브후스는 동료들과 어울려 느긋하게 즐기고 있던 식사를 중단당해야 했음에도 6년 전과 다름없는 소탈한 태도로 싸인에 응해주었다. 돌아온 F는 “좋은 사람이야…”하고 중얼거리더니 “머리숱이 그토록 적어지다니 가여워…”하고 넋나간 소리로 덧붙였다. 게르기에프를 대하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
--------------------------
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
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