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이상 같은 음악제를 다니다 보면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된다. 그 사람들이 해마다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도, 그게 어떤 형태가 됐든, 인생의 끝을 향해 한 걸음씩 착실히 내딛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잘츠부르크는 험준한 산들로 에워싸인 녹음 풍성한 땅이다. 8월 중순을 지나면 사과나 마로니에 잎에 반사된 햇볕에는 벌써 가을빛이 완연하다. 매년 그 풍경을 볼 때마다 지금은 푸르고 무성한 나무들 잎이 머지않아 떨어질 것을 예감하곤 나 자신도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런 감개를 F에게 얘기해보지만 그녀는 그다지 공감하는 기색이 없다. “당신은 언제나 한여름이야”하고 내가 놀리면, “그럼요. 한여름이 지나면 휘릭 사라지는 거죠”하고 대답한다. “매미같군”하면, “맞아맞아. 요란스레 울고 있는가 했더니 어느새 울음소리 그쳐, 살펴보니 죽어 있더라는…”하고 맞장구를 친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도 정말 그렇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F가 잘츠부르크에 체류할 때마다 꼭 들리는 프라이드 치킨 가게가 있다. 가게라곤 하지만 큼직한 차를 노상에 세우고 그 짐칸에 닭을 올려놓고 파는 노점상이다. 매주 목요일에는 미라벨 광장 가까이에 서는 시장에서 가게를 열고, 토요일에는 축제극장 인근에 자리를 편다. 이 가게의 닭고기 맛이 좋다. 일본에서 먹는 닭고기와는 전혀 다른데, 클 뿐만 아니라 육질이 단단해서 씹는 맛이 난다. 처음엔 부부와 남편 쪽 모친인 듯한 할머니, 그리고 뺨이 발그레한 10살 정도의 아들 4인 가족이 꾸려가고 있었다. 내가 해마다 그 가게에 간 것은 물론 닭고기 맛이 좋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부모를 도우며 바지런히 일하는 똘똘한 소년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고, 그 아이가 매년 조금씩 성장해가는 걸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올해도 그 노점상엘 갔는데 그 귀여웠던 소년은 안경을 낀 장성한 청년이 돼 있었다. 할머니와 며느리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여성 일꾼 몇 명이 있었다. 근면한 사람들의 장사가 번창하는 걸 지켜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잘츠부르크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 가게에서 큼직한 닭 뒷다리를 뜯고 있었는데, 곁에서 미하엘 샤데Michael Schade와 그의 아내, 아이들이 마찬가지로 닭고기를 먹고 있었다. 샤데는 그 전날 우리가 본 <돈 조반니 Don Giovanni>에서 돈 오타비오Don Otavio를 연기한 테너인데 그때는 지금처럼 유명하진 않았으나 이미 그 부드러운 미성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우리에겐 극장에서 방금 본 가수가 곁에서 프라이드 치킨을 선 채로 먹고 있는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호감이 가기도 했다. 작은 마을에서 열린 음악제이다 보니 연주가와 청중의 거리가 가까워 이런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아직 잘츠부르크의 신참자였던 우리는 이 기회에 싸인이라도 받아둘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모처럼 가족이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방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무엇보다 그의 손이 치킨 기름으로 끈적끈적해져 있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 뒤 몇 번인가 샤데가 노래하는 걸 지켜봤다. 최근에는 MET(맨해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이브 뷰잉 오페라 마스네Jules Massenet(1842~1912)의 <타이스 Thaïs>에서 그는 뚱뚱하게 살찐 속물적 갑부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맨 처음 본 성실한 돈 오타비오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 연기자로서의 성숙함도 나는 좋게 봤다.
싸인이라면, 잘츠부르크 공항에서 F가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Valery Abisalovich Gergiev(1953~ )의 싸인을 받은 적이 있다. 처음 음악제에 간 2000년이었는데, 나와 F는 잘츠부르크 축제 대극장에서 그가 지휘하는 빈 필의 스트라빈스키Igor Fedorovich Stravinsky의 <불새 Firebird>를 들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때까지 <NHK>교향악단 등이 연주하는 <불새>를 몇 번이나 들었으나, 그때의 연주는 그전에 내가 들어본 모든 <불새> 중에서 최고였던 것은 물론, 모든 오케스트라 연주 중에서도 베스트 5로 꼽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점에서는 F도 동의했으나, 게르기에프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몹시 권력지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닌 사람이 클라우디오 압바도Claudio Abbado다.)
하지만 바그너나 카라얀의 예를 들 것까지도 없이 좋은 음악가는 좋은 사람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예가 많지 않을까.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지닌 얄궂은 매력이기도 하다. 특히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는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 만큼 지휘자에겐 단지 예술적 통솔력만이 아니라 기획 입안, 자금 조달, 선전광고 등의 면에서도 다면적인 재능이 요구된다. 정치가나 실업가와도 잘 사귀어 둬야 한다. ‘좋은 사람’과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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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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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