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티에는 2001년 시즌 종료와 함께 잘츠부르크 음악제 총감독직을 사임하고 파리 국립오페라 감독직을 맡고 있었으나 올해부터 뉴욕시 오페라 감독에 취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뉴스는 예산문제로 뉴욕행을 포기하고 스페인으로 갈 것이라 전하고 있다.
프로코피에프의 오라토리오 <이반 뇌제>는 제1급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무턱대고 감동할 수만은 없는 요소가 포함돼 있다. 또 하나, 그가 음악을 담당했던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1938년)는 13세기에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 기사단을 노브고로드Novgorod의 영웅이 격퇴하는 이야기다. 프로코피에프는 이 영화의 음악을 나중에 칸타타cantata로 정리한다. 이 영화도 <이반 뇌제>도 모두 나치 독일과의 전쟁 상황 속에서 민중을 조국방위에 동원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파시즘의 침략으로부터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한다는 대의는 당시 의심할 여지 없는 정당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에 느슨함이 없는 것은 그 자신이 전쟁 한복판에 서서 실제로 밀려오는 위기와 고난을 겪으면서 작곡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거기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이반 뇌제>는 지금의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할거했던 몽골계 민족에 대한 정복 이야기다. 곡의 피날레는 이반 4세가 “나는 민중의 소리를 들었다! 민중의 소리는 신의 소리다! 하느님은 내 손에 복수의 칼을 쥐여주었다. 장대한 사명을 이루고야 말리라!”하고 노래하면, 민중의 대합창이 “적들의 뼈 위에, 검게 불탄 폐허 위에 러시아는 통일되고 있다!”라고 응답한다.
내가 먼저 생각한 것은, 당시 러시아인과 함께 소련 국민을 구성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이 곡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었다. 소련은 원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라는 국명이 가리키는 대로 특정 민족이 중심이 된 국가가 아니었다. 레닌이 강조한 대로 대러시아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여러 민족들이 대등한 자유의지로 결합한 국가여야 했다. 소련과 러시아는 같은 것(equal)이 아니었다. 파시즘으로부터 소련을 수호한다는 것과, 러시아를 수호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것은 소련 건국의 이념 그 자체에 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이런 영화,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걸까. 강대한 독일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 민중의 애국정신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불가피한 필요악이었다, 따위가 생각해낼 수 있는 설명일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런 설명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런 사고방식이 제도화되면 터무니없는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걸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민족주의를 동원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이겨낸 소련은 그 45년 뒤 여러 민족들의 민족주의를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때 엊그제까지의 공산당 간부가 하룻밤 사이에 데꺽 국수주의자로 변신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했다.
사회주의 이념을 내버린 러시아는 이젠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1952- )과 메드베데프Dmitry Anatolyevich Medvedev (1965- )라는 권위주의적인 권력자가 통치하는 일개 초대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현재라는 시점에서 이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큰 갈채를 보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이 음악을 어떻게 들었을까. 내 눈에는 무대 위에서 가슴을 펴고 있는 득의만면한 무티의 모습이 어쩐지 불길하게 보였다. 그가 손에 든 지휘봉은 음악계의 혁신파에 대한 ‘복수의 칼’이 아닐까?
무티는 1986년 클라우디오 압바도Claudio Abbado(1933- )의 후임으로 스칼라좌 음악감독에 취임한 이래 장기간 군림해왔으나 2005년에 관현악단원과 직원의 투표 결과 불신임당했다. 그해 4월에 사임할 때 무티는 직원들의 ‘적의’를 그 이유로 들었다. 그 사건의 배경에는 무티가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1937- ) 총리와 친밀한 관계인 데 비해 총지배인인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는 좌파인 데서 오는 정치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실의에 빠졌던 무티였으나, 집요하게 반격을 가해 올해부터는 시카고 교향악단 음악감독에 취임하기로 돼 있다. 일찍이 카라얀이 제왕으로 군림했던 잘츠부르크의 차기 제왕 자리를 그가 노리고 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교외의 아니프Anif라는 풍광명미한 마을에 헬리포트까지 갖춘 저택에서 살았으며, 사후에는 그 마을 묘지에 묻혔다. 카라얀 부인이 좋게 생각하는 무티도 같은 아니프 마을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했지만 내가 무티의 음악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좋은 음악가라는 건 별개의 문제다. 그게 음악이라는 예술을 한 가지로 규정해버릴 수 없는 복잡성이자, 위험스런 재미다.
8월 24일 우리는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von Gluck(1714-1787)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Orfeo ed Euridice>를 관람했는데, 역시 무티가 지휘하는 빈 필이 연주했다. 연출은 평범하고 고급 휴양지의 오락연극 같았으나 음악은 훌륭했다. 오르페오 역의 엘리자벳 쿨만과 에우리디체 역의 제니아 큐마이아는 모두 아직 젊었지만 2중창으로 멋진 앙상블을 선사했다. F에 따르면, 그건 “무티의 지휘 덕분”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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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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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