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8월 20일이다. 이번 잘츠부르크 체류일정 중 3분의 2가 지나갔다. 대학 기숙사에 숙박하면서 아침식사 뒤 산책하고 오후에는 글을 썼으며, 저녁부터는 날씨가 좋든 궂든 농부가 밭에 나가듯 콘서트에 가는 생활을 2주일 남짓 계속해온 셈이다. 이보다 더한 사치가 없다고 할 만한 생활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렇게 매일 콘서트가 이어지면 관람하는 일이 종종 ‘고역’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어쩐지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는 느낌과 함께 이 세상에 음악제 같은 게 없어졌으면,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매일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F는 그런 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 차이가 심해지면 심리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이번엔 이곳에 온 뒤 어제까지 오페라에서부터 실내악까지 모두 13개의 공연을 들었다. 그 모두가 일류 연주자들의 일류 연주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정말 마음을 울리는 명연주를 만난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11일에 본 오페라 <룰루>나 12일의 오라토리오 <화형대 위의 잔 다르크 Jeanne d'Arc au bucher>, 또는 오늘 밤에 본 오페라 <엘렉트라 Elektra>처럼 큰 기대를 걸며 봤다가 기대와 어긋날 때는 낙담도 크다. 연주가 명백히 신통찮은 경우는 오히려 납득하기 쉽지만, 연주도 좋고 주변 청중들도 즐거워하는데 나만 별 감흥이 없을 때는 찜찜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는다.
연주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그게 일정 수준을 넘기만 하면 그다음은 개인의 주관에 좌우된다. 아니 주관이라기보다는 좀 더 감각적인 것이다. 예컨대 빈 필과 베를린 필의 경우 사람에 따라 그 음색에 대한 선호에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 더 나으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청중 대다수가 절찬할 때 내가 그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건 내 감각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F처럼 자신의 감각을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늘 내 감각에 자신이 없다. 좋은 음악, 좋은 연주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과연 나는 그걸 알 수 있을까?…
언제나 그런 답 없는 자문에 사로잡힌다. 숙소에 돌아오는 발걸음도 무겁고, ‘고역’이라는 말이 마음속을 스쳐 간다.
F가 불쑥 말했다. “우리는 이곳을 10년 이상 다니며 많은 음악을 들었는데, 좀 사치스러워졌는지도 모르겠네.” “그래 맞아”하고 내가 대꾸했다. “전에는 이름만 알고 있던 일류 음악가의 연주를 실제 접해 봤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이제는 거기에도 익숙해져 요구수준이 높아졌는지도 모르지. 예컨대 파트리샤 프티봉Patricia Petibon이 <룰루>라는 어려운 곡을 가뿐하게 불러 젖히는 걸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크리스티네 셰퍼Christine Schäfer에 비해 좀 부족하다고 느끼듯이. 그래도…” 나는 덧붙였다. “그게 행복한 건지…”
그래도 여름 한 철 2, 3차례 “아!”하고 탄식이 새어나오는 연주와 마주칠 때가 있다. 음악에서나 스포츠에서 인간이 단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는 게 있다. 하지만 인간 중에 어떤 종의 인간들, 간단히 말해 ‘천재’인데, 그런 인간들은 노력이나 단련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윤이상 선생은 만년에 “천상에는 늘 시작도 끝도 없는 음향이 흐르고 있어서 내게는 그것이 들린다”고 말했다. ‘천재’란 천상의 음향을 들을 수 있고, 그것을 지상의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제한된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다니면 매우 드물게 그런 천재와 조우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모차르트나 슈만 같은 과거 천재와의 재회인 경우도 있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살아 있는 인간일 경우도 있다. 그런 조우가 기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너무 단순하다. 자신이 갖고 있던 미적 감각이 확 넓어진다는 느낌과 함께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가사의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런 순간이 있기 때문에 잘츠부르크에 다니는 걸 그만두지 못하고 ‘고역’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올해 내가 여기서 만난 천재는 18일 솔로 콘서트에서 연주한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Arcadi Volodos다.
원래 이날 예정돼 있던 것은 크리스티안 짐머만Krystian Zimerman의 콘서트였다. 짐머만은 일본에도 자주 오는 거물 피아니스트로, 우리도 지난해 나가노 시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짐머만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연주회 직전에 출연을 취소했다. 실은 그가 공연을 취소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3년 전에도 이번과 꼭같이 그의 공연취소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 더욱 이번에야말로 잘츠부르크라는 큰 무대에서 그가 어떻게 연주를 할지 꼭 들어보고 싶었다.
취소한다는 통지는 연주회 전날에야 음악제 사무국이 메일로 전달했다. 따라서 대역인 볼로도스는 급히 불려 나왔을 것이다. 틀림없이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축제 대극장으로 갔다. 대개의 경우 연주 시작 전에는 ‘티켓 구함’이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이 극장 입구에 줄을 서 있는데, 이날은 ‘티켓 팝니다’는 피켓이 눈에 띄었다. 짐머만 팬들이 어렵게 입수한 티켓을 팔려는 것이다. 볼로도스에겐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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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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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