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 시작부터 제9회까지 나 자신의 음악편력을 연대순으로 엮어봤는데, 그걸 이쯤에서 멈추고 현재의 시점으로 날아와 2010년 잘츠부르크Salzburg 음악제 현지보고를 올리고자 한다.
나는 지금 F와 함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시내의 대학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다. 여기에 올 때마다 이용하는 정기숙박이다. 값싸고 조용하고 청결하다. 공동 취사장에서 밥을 해먹을 수 있고 세탁기나 다리미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F의 마음에 들었다. 이 기숙사를 발견할 때까지 처음 4, 5년은 비싼 호텔료 때문에도 고생했으나 매일 세탁물을 처리하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올해로 90주년을 맞이했다. 시내에선 기념 전시회 등도 열리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나는 그 90년 중 2000년 이후 11년간 매년 여름이면 빠짐없이 잘츠부르크를 찾았다. 체류기간이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었지만 올해는 이제까지 가장 긴 4주간을 머무를 예정이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제1차 세계대전 뒤 전쟁으로 황폐해진 예술의 재건과 진흥, 평화와 우애의 메시지 발신, 그리고 생활이 곤궁한 음악가와 예술가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를 중심으로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등이 함께 시작했다. 음악가로는 이른 시기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브루노 발터Eigentlich Bruno Walter Schlesinger가 참여했고 나중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와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 크나퍼츠부쉬Hans Knappertsbusch 등도 참여하면서 발전해나갔다.
그러나 나치스는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전부터 음악제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병합이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자 토스카니니와 발터 등이 음악제를 떠났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나치스의 간섭이 더욱 심해졌으나 가까스로 명맥은 유지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잘츠부르크는 미군이 점령했으나 음악제는 열렸다. 전쟁 전의 음악제에서 중심적인 존재였던 푸르트벵글러와 그의 숙적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은 모두 비나치화 심사(친나치 전력이 있는 자들을 조사해서 그 협력 정도에 따라 처벌 수준을 결정하는 심사)를 받게 되고 음악제에 금방 복귀할 순 없었다. 푸르트벵글러는 1947년에야 복귀했으나 1954년에 사망했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라는 두터운 벽에 가로막혀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관여하지 못하다가 푸르트벵글러 사후 1956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음악제 예술감독으로 취임했고 1960년에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카라얀이 ‘제왕’이었던 시절에 잘츠부르크는 “모나코와 니스가 이사왔다”고 할 정도로 유럽 각지의 부유층들이 모여든 호화로운 사교장이 됐고, 입장료도 비싸 음악제의 재정은 아주 윤택했다.
2000년 봄, 내가 처음 F에게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가자”고 꼬드겼을 때 엄청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입고 갈 옷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성이란 정말 엉뚱한 일에 신경 쓰는 존재로구나 하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으나, 그것은 그녀의 뇌리에 카라얀 시대의 음악제 이미지가 각인돼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당시의 분위기는 남아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입장료도 인터넷으로 사전에 구입하면 세간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비싼 건 아니다. 예컨대 이번에 내가 구입한 티켓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은 오페라의 110유로, 제일 싼 건 실내악 연주회의 15유로다. 연주자나 연출자의 면면을 고려하면 일본 국내 연주회보다 오히려 싸다고도 할 수 있다.
1989년 카라얀의 급사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카라얀 시대엔 종지부가 찍혔다. 그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 일본 쇼와[昭和] 천황의 죽음과 같은 해에 일어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상징적이다. 1992년에 벨기에인 제라르 모르티에Gerard Mortier가 예술감독에 취임해 개혁을 시작했다. 더욱 현대적인 음악들을 연주곡으로 도입하는 동시에 젊은 연주가와 연출가를 대담하게 기용함으로써 음악제를 호화로운 사교장에서 진지한 예술적 투쟁의 장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2000년에는 하이더Jörg Haider가 이끄는 극우정당이 오스트리아 연립여당에 참여한 데 항의해 모르티에는 사의를 표명했고 많은 오스트리아 시민이 그의 유임을 촉구하며 극우정당 반대 시위를 계속했다. 내가 잘츠부르크를 찾기 시작한 것은 이 모르티에 시대의 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1년에 모르티에가 임기 만료로 퇴임한 뒤에는 페터 루지카Peter Ruzicka가 후임이 돼 나치스의 박해를 받은 유대인 음악가 슈레커Franz Schreker와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 등의 작품을 재조명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는 유르겐 플림Juergen Flimm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역사는 전쟁과 나치즘이라는 과거와 분리될 수 없으며, 지금도 음악제에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음악제는 실로 정치와 예술이 상극(相克)하는 장이고, 예술에서 정치적 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것도 바로 이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전하려 한다.)
이번에 나와 F가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건 8월 5일 밤이었다. 출국할 때 일본에서는 기록적인 더위가 이어지고 있었고 노인들이 일사병으로 숨졌다는 뉴스가 거의 매일 흘러나왔다. 한데, 이곳에 도착하니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기온도 밤에는 섭씨 13도 정도까지 내려갔다. 지금은 선선하고 쾌적하지만 이런 날씨가 죽 이어지면 평소에도 뭔가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기 쉬운 나는 더욱 암울한 기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슈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브람스Johannes Brahms, 볼프Hugo Wolf,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등의 음악에 깊이 몸을 내맡기기엔 절호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체류기간 중에 모두 23곡을 감상한다는 스케줄을 짰다. 오페라 5곡, 교향곡 6곡, 리사이틀(recital)이나 실내악 등이 12곡. 이밖에 바드 이슐Bad Ischl까지 가서 오페레타(operetta)를 하나 보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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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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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