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니 거기에 무기적(無機的)인 상자 모양의 극장이 있었다. 1919년 샤르로텐부르크 도이체Charlottenburg Deutsche 가극장(歌劇場)으로 출발한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는 일찍이 브루노 발터Eigentlich Bruno Walter Schlesinger도 음악 총감독으로 있었던 명문이다. 1983년 당시 서베를린에 있던 유일한 가극장으로, 주립 가극장과 코미슈오퍼Komischoper는 내가 갈 수 없는 동쪽에 있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건대, 나는 작곡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그때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상태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는 <알프스 교향곡>과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에 나오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2곡밖에 들은 게 없었고 그가 오페라 작품에서 마음껏 발휘한 세련과 해학에 대해선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살로메>의 바탕이 된 이야기는 <신약성서>의 마르코 복음서 제6장과 마태오 복음서 제14장에 나온다. 고대 팔레스타인 영주 헤로데는 형이 죽자 그의 처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이 이를 계속 비난한다. 헤로데의 생일날 연회장에서 헤로데의 새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딸(살로메)이 춤을 추었는데 헤로데는 몹시 마음에 들어 “네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의 꼬드김을 받은 살로메는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저한테 주십시오.” 왕은 약속을 한 이상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요한이 갇혀 있던 감옥에 사람을 보내 그의 목을 베게해서 살로메에게 준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희곡은 그 이야기의 부도덕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형을 죽여 형수를 빼앗은 헤로데는 이제 자신의 아내가 된 여인의 딸인 살로메에게 호색적인 눈길을 보낸다. 살로메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예언자 요카난(세례자 요한)이 수감돼 있는 감옥에 가서 금지령을 어기고 요카난을 만난다. 살로메는 요카난을 향한 뜨거운 연정을 품고 있지만 요카난은 상대해주지 않는다. 연회장에 돌아온 살로메는 고혹적인 춤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요카난의 머리를 베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1905년 이 오페라가 초연됐을 때 전에 없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내용이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빈 등 각지에서 상연이 금지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쓴 내용은 나중에 조사해서 알게 된 것들이다. 베를린에서 작품을 실제로 봤을 당시 내게는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었다. 무슨 얘기인지조차 잘 모르는 채 나는 작품의 관능성에 처음엔 당혹했으나 이윽고 빨려 들어갔다. 제4장 ‘7개의 베일을 두르고 추는 춤’은 살로메가 헤로데를 유혹해서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는 장면이다. 여성가수가 단지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라의 흰 몸을 드러낸 채 멋지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질투, 권력욕, 독점욕, 잔혹스런 성욕 등 인간의 네거티브한 감정들이 거리낌 없이 묘사되는 데에 놀라고, 그런 것들이 한없이 매혹적이라는 데에 또 놀랐다.
유럽 각지의 교회와 미술관에서 많은 종교화를 봤는데, 그중에는 몹시 잔혹스런 장면을 묘사한 것들이 있다. 모두 성서 등 종교상의 교의를 시각화한 것이며, <살로메>는 그 대표적인 주제다. (일례를 들자면,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가 몰타의 기사단에 헌납한 <세례자 성 요한의 참수>(1608)가 있다) 하지만 이들 종교화는 교의의 뜻을 그림으로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생생한 감촉, 굳이 말하자면 관능성을 띠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불가사의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오페라를 보고 뭔가 좀 이해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을 두려워하는 이 땅의 사람들은 인간의 무서운 욕망도 잘 알고 있어서 거기에 매혹 당하는 것이다. 욕망이 강하기에 금욕을 요구받고 배덕(背?)의 매력을 알고 있기에 도덕이 강조될 터이다. 서양 기독교 문화의 그런 이면성, 복잡성이 점점 더 내 흥미를 자아냈다.
막이 내린 순간 공연장 내에 요란한 부잉(booing)이 울려 퍼졌다. 내가 보기에 관객의 절반 가까이가 불만의 의사표시를 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음악도 연기도 뛰어났고, 주역들은 멋지게 노래하고 연기한 것으로 보였는데.
“왜 그래요? 뭔가 문제가 있었나요?” 나는 미미에게 물어봤다.
“글쎄요…” 미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그녀가 미국인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 추측이 옳았던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까지도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이야기로만 들었던 부잉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고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관객도 작품창조에 개입하는 것인가, 얼마나 치열한 세계인가, 그리고 저 히로인은 얼마나 당당하게 시련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커튼콜(curtain-call)로 다시 무대에 나타난 살로메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심한 부잉에도 흔들리지 않고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정중한 예를 거듭 표했다. 그 모습은 마치 취객들의 난잡한 시선을 홀로 견뎌내면서 무도한 아욕(我欲)들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여성 살로메로 비쳤다.
살로메 역을 맡은 여성은 캐런 암스트롱Karan Armstrong이었다. 1941년에 미국에서 태어났으니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는 40살을 넘긴 나이였으나 도무지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몰랐을 뿐 그녀는 당시 이미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Bayreuther Festspiel에서 <로엔그린 Lohengrin>의 왕녀 엘자역을 맡는 등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2005년 가을 윤이상 10주기 기념 콘서트 때문에 베를린에 간 나는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에서 쿠르트 바일Kurt Weill의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륭과 몰락 Aufsteig und Fall der Stadt Mhagonny>을 봤는데, 암스트롱이 거기서 중요한 배역을 맡은 것을 보고 일말의 감개를 느꼈다. 처음 거기서 그녀를 본 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관객들의 지지로 살아남아 계속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당한 존재감이었다. 얼마나 강인한 여성인가.
‘프라이’를 모토로 삼아 살아온 미미는 그 뒤 독일에서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뒤 딸 둘을 데리고 일본에 돌아왔다. 잠시 얼굴을 못 봤는데, 건강하신지?
베를린에서 <살로메>를 봤을 때의 일을 나는 종종 F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F는 그걸 본 적이 없었으므로 얘기가 잘 안 통했다. 그래서 어느 독일 지방도시의 오페라단이 일본에 와 도쿄에서 <살로메>를 상연했을 때 F를 꼬드겨 보러 갔다. 젊은 날에 받았던 충격을 그리워하는 기분도 내게는 있었다.
그러나 살로메 역을 맡은 가수는 단지 외치듯 노래하며 무릎을 구부린 볼품없는 자세로 무대 위를 요란하게 뛰어다닐 뿐이었다. 분명 서툰 상연이었으나 부잉은 없었다. 역시 베를린과는 꽤나 달랐다. (*)
--------------------------
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
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