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늦가을(晩秋), 나는 파리를 거점 삼아 주변 나라들에 짧은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서베를린에 간 것은 11월 하순이었다. 당시 서베를린은 동독 영내에 오도카니 떠 있는 고도와 같은 곳이었다. 그 고도에서 나는 한 일본여성을 만났다. F의 음악대학 시절의 동기로, 성악을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다. 독일인 연인이 ‘미미짱’이라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도 미미라고 해두자. 여행을 떠나기 전 F가 내게 베를린에 들르면 미미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그때는 딱히 베를린에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연락처만 받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리에 머물던 중 생각이 바뀌어 베를린에 가 보기로 했다. 뒤러, 크라나흐Lucas Cranach, 홀바인Hans Holbein 등의 명작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솟구친데다 베를린 교외에 사는 윤이상(尹伊桑) 선생을 찾아가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윤 선생과의 인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얘기하려 한다).
베를린에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미미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막판까지 머뭇거렸다. 왜냐면 당시 나는 될 수 있는 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몹시 고독했으나 그 이상으로 타인과 사귀려다 나 자신이 다칠까 봐 더 두려워했다.
좁고 살풍경한 테겔Tegel 공항에 내렸더니 작은 몸집의 일본인 여성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약간 진하다 싶은 아이라인으로 눈가를 검게 손질했다. 초대면 인사를 나눈 뒤 마중 나와 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그녀는 입술을 약간 뾰죽하게 내밀고 노래하듯 말했다. “아무 걱정 마세요. F짱 친구라면 곧 제 친구니까요…” 독일어 발음 영향 때문인지 그 말에는 슈슈 하는 음이 섞여 있는 듯했다.
미미는 “F짱한테서 이게 와 있어요”하고 작은 그림엽서를 내게 건넸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몇 줄 적혀 있었다. “조금 전에 친구와 만났는데,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가 화젯거리였습니다. 당신이 모두로부터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저 멀리 일본에서 F가 내게 던져 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로프처럼 여겨졌다. 표류자에게 던져진 구명로프인가, 아니면 헤매는 소를 묶어 놓기 위한 올가미줄인가.
모두한테서 사랑받다니? 내가?…
나는 그런 얘기를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다.
F가 말한 그 ‘모두’란 실은 ‘나’란 의미가 아닐까?…
잠시 그런 내 멋대로의 상상을 하고는, “아, 내가 지금 꽤나 약해져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이 원고를 쓰면서 F에게 “그때 던진 건 올가미줄이었어?”하고 확인해봤더니, 일소에 붙여버렸다).
미미가 예약해준 작은 여관에 체크인한 뒤 그녀와 잠시 얘기를 나눴다. 나는 유학생활이나 음악 관련 일들에 대해 물었고, 얘기가 나온 김에 내처 내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동베를린 얘기다. 당시에는 아직 베를린이 벽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분단돼 있었는데, 미미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벽 동쪽으로 갈 수 있었다. 동쪽은 물가가 싸고 특히 악보(?譜)를 값싸게 살 수 있어서 자신과 같은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 동베를린. 나도 가 보고 싶지만 갈 수 없어요”라고 했더니 그녀는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당신, 국적이 일본 아닌가요?”
나는 내가 재일조선인이며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단히 설명하고, 내게는 금단의 땅인 동베를린 거리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고 싶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은 막연해서 구체적인 이미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미미는 물론 내게 일본어로 얘기했으나, 얘기 속에 종종 ‘프라이’라는 말이 섞여들었다. 프라이는 독일어Frei, 즉 자유를 말한다. 그녀는 유복하진 않았으나 일본에서 겪어야 했던 숨 막히는 속박에서 벗어나 베를린의 자유로운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베를린은 68년 세대가 사회의 중핵을 차지하고 리버럴 좌파적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정착해 있었다.
“여기서는 누구나 프라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한다, 그거죠. 당신도 좀 더 프라이해지면…” 미미는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
나는 분단된 민족의 일원, 군사독재국가의 국민, 정치범 가족이고, 게다가 재일조선인이었다. 그처럼 몇 겹으로 구속돼 있는 인간이 어떻게 자유롭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당신은 자유롭게 오가는 동베를린에 나는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그런 말이 속에서 치밀고 올라왔으나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해봤자 잘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상대나 나나 상처만 받고 말 게 뻔했다.
다음 날이나 그 다음 날로 기억하는데, 나는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Deutsche Oper Berlin를 보러 갔다. 미미가 티켓을 예약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공연제목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d Georg Strauss의 <살로메 Salome>였다. 그게 내가 공연 실황을 현장에서 직접 본 첫 오페라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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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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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