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을 데리고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다시 또 프랑스를 주마간산 격으로 돌고 파리에서 여동생을 일본으로 돌려보낸 뒤 나 홀로 남았다. 소르본대학 근처 카르티에 라탱Quartier latin의 싼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매일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봤다.
11월 하순의 어느 추운 밤 나는 티켓을 손에 쥐고 살 플레옐Salle Pleyel로 갔다. 처음으로 그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살 플레옐이라는 이름은 나도 알고 있었다. 피아노 제작업체 ‘플레옐’사가 1830년에 문을 연 음악전용 홀이다. 쇼팽Fryderyk Chopin은 플레옐의 피아노를 애용했고 이 홀에서 콘서트도 열었다. 1924년에 지금의 장소인 포부르 생토노레Faubourg Saint-Honoré거리로 옮겼고 1927년에 개장 콘서트가 열렸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Concertgebouw, 뉴욕의 카네기홀Carnegie Hall과 나란히 세계의 대표적인 클래식 음악전용 홀로 알려져 있다. 그 홀에 나는 발을 디딘 것이다.
지휘자 로린 마젤Lorin Maazel은 그때 53살. 11살 때부터 신동 지휘자로 알려졌던 그의 화려한 경력의 절정기였다. 관현악은 파리 국립관현악단, 수석 플루트 주자는 당시 역시 원숙기에 있던 명연주자 장 피에르 랑팔Jean-Pierre Rampal이었다.
곡목은 드뷔시Achille Claude Debussy의 <목신의 오후를 위한 전주곡>, 라벨Maurice Joseph Ravel의 <모음곡(組曲) 다프니스와 클로이 Daphnis et Chloe>, 그리고 휴식시간 뒤 다시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였다. 전형적인 ‘프랑스류’의 프로그램이었으나 실은 그것은 내가 바라던 건 아니었다. 표를 그것밖에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압도적으로 독일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중후하고 정통적인 독일음악에 비해 프랑스음악은 경박하고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나중에 샤를 뒤트와Charles Édouard Dutoit가 <NHK> 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취임하고 난 뒤부터 그런 경향이 많이 바뀐 듯하다). 나도 그런 풍조의 영향을 받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연주곡목이 프랑스류여서 유감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Johannes Brahms 라면 좋을 텐데… 그런 기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무대에 나타난 마젤은 예상 이상으로 키가 크고 자세도 당당했다. 그가 처음 지휘봉을 내려긋는 순간! …오싹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 살갗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음악을 듣고 그런 감각에 휩싸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때가 처음이었다.
음향이 귀에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직접 피부를 통해 등줄기 뼈를 울리며 들어왔다. 무대 위에서는 무지갯빛 불꽃이 잇따라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는 파리다, 라는 생각 따위는 금방 잊어버렸다. 살 플레옐이니 마젤이니 랑팔이니 하는 껍데기는 의식에서 깨끗이 지워져버렸다.
음악이라는 건 결국 갖가지 음의 연결, 음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아, 얼마나 관능적인가… 매료당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목신의 오후를 위한 전주곡>은 그전에도 라디오나 레코드로 곧잘 들은 적이 있지만 그때 내 눈앞에서 연주되고 있던 음악은 내가 알고 있던 그 음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작품은 드뷔시가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당초 전주곡(前奏曲)·간주곡(間奏曲)·종곡(終曲)의 3부작으로 구성된 교향시로 구상했으나 작곡가가 이 전주곡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다는 느낌을 갖게 돼 간주곡과 종곡의 작곡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시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뜨겁고 나른한 여름날 오후. 풀밭에서 졸고 있던 목신(牧神)이 눈을 뜬다. 그는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으로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불며 미역을 감고 있던 요정을 생각한다. 그 하얀 피부가 눈부시다. 껴안고 싶다. 목신은 손을 뻗친다. 그러나 요정의 환상은 꺼져버린다. 목신은 공상의 나래를 더욱 크게 펼친다. 그리고 마침내 비너스를 붙잡는다. 포옹! 관능의 폭풍! 환호! 이윽고 환상은 사라지고 목신은 다시 눈을 뜬다. 주위에 소리는 없고 후끈한 풀냄새만 그를 조용히 감싸고 있다. 권태감 속에 목신은 어느샌가 또 졸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콘서트가 끝나고 살 플레옐을 나오니 밤도 깊은데 추운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를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오가고 있었다. 카페의 환한 유리창 너머 담소하는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곳엔 누구 한 사람 내가 아는 이가 없다.
여기는 나의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그건 알고 있었다.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에 쓴 적이 있지만, 중학생 시절부터 뇌리에 각인된 시구가 있다.
또다시 음(音)의 세계와 색(色)을 즐기는 곳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텅 빈 지하철을 타고 카르티에 라탱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 시구를 자꾸 떠올렸다. 나는 ‘음(音/음향)의 세계와 색(色/색채)을 즐기는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몸을 두어야 할 곳은 예컨대 한국의 감옥이 그렇겠지만 음도 색도 없이 치열한 투쟁만이 있는 그런 세계인 것이다. 원래 나는 그런 세계의 인간이고 그런 세계로 돌아가야 할 존재인 것이다.
처절할 정도로 고독했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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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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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